말할 곳이 없어 글을 썼습니다

엄마 마지막 면회

by 꼬야책방

마지막 면회

막내아들과 유난히 대화를 많이 했던 엄마였다.

시시콜콜한 시골동네 이야기,
까마득한 어린 시절 이야기들.
다른 형제들은 잘 듣지 않던 그 이야기들을
막내는 늘 눈을 반짝이며 들어주었다.

어젯밤,
"이제 면회를 마치겠습니다. 보호자분들은 퇴실 부탁드립니다."

막내아들이 엄마 손을 놓지 못했다.
어깨가 들썩이고, 목이 메고,
꺼이꺼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모습이
엄마 눈에 들어왔을까?

누구보다 다정하게 엄마와 이야기 나누던
그 막내오빠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따라 흘렀다.

참다 참다,
결국 터져 나온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엄마는 기억할까.
마지막까지 자신의 손을 놓지 못하던
막내아들의 따뜻했던 그 손을.




그에 비해 난, 엄마랑 시시콜콜 이야기 나눴던 추억이 없다.

막내오빠가 엄마 손을 꼭 잡고 꺼이꺼이 울던 그 순간,

어린 시절, 아마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1학기 중간고사를 잘 봤다. 전교 4등. 총 학생 수가 몇 명이었는지 지금 계산해 보니 8 학급에 45명? 47명? 대략 400명 정도였나 보다. 시골 중학교치곤 꽤 큰 규모였다.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이 정도 성적이면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좋겠어요." 선생님은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씀하셨다. 그날의 설렘을 지금도 기억한다. 시골을 벗어나 도시의 학교에 갈 수 있다는 희망. 처음으로 내 미래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하면서 엄마에게 담임 선생님과의 대화를 조심스럽게 전했다.

"엄마,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내가 광주 고등학교 갈 수 있대."

엄마는 설거지하던 손을 멈추지도 않고 아무 말도 안 했다.


너무 서운해서 울었다. 그래도 오빠는 고등학교 보내면서 나에게는 공장에 취직하라니. 진짜 서러웠다. 지금까지도 그 순간이 생각나는 걸 보면, 그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설거지를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엄마는 내 옆에 서서 계속 설거지를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로도, 설명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내 꿈은 설거지통 물처럼 하수구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 공부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 해봤자 뭐 하나 싶었다. 성적은 상위권을 쭉 유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골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할 정도는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다는 것에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아버지는 달랐다. "공부 잘하는데 보내야지." 그 한마디가 내겐 구원이었다.

시골 형편이 그리 좋은 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엄마 눈치를 많이 봤다. 교과서를 새로 사야 할 때, 체육복을 맞춰야 할 때, 수학여행비를 내야 할 때마다 엄마 얼굴을 보는 게 두려웠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주변 친구들이 대학 진학 준비를 할 때였다. 나도 대학을 가고 싶었다. 간절했다.

"엄마, 나 대학 가고 싶어."

엄마는 더 펄쩍 뛰셨다. "대학은 무슨! "

내가 벌어서 갈 테니 걱정 말라며 대들었다. 그날 엄마의 한숨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보기 싫었다. 그들의 환한 웃음이, 부모님과 함께 찍는 사진들이 견딜 수 없이 부러웠다. 무작정 짐을 싸서 서울로 갔다.

큰오빠네 형편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지만, 거리에서 잘 수는 없는 거니까 다락방에서 잤다. 좁고 더운 다락방이었지만 그곳이 내 유일한 안식처였다.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대학 준비를 했지만, 등록금을 모으기엔 벅찼다.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전단지 돌리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못 자면서 일하고 공부했다.

결국 아버지께 등록금만 달라고 부탁했다. 적성과는 상관없이 취업이 잘 된다는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되었다.

4년 내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했다. 마지막 학기엔 간호사 국가고시를 공부해야 했기에, 마지막 등록금만큼은 아버지께 다시 부탁했다.

첫 등록금과 마지막 등록금. 딱 두 번.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난 아버지 등골을 빼먹었다. 미안했다. 지금도 미안하다.

대형 병원에 취직하고 나니, 엄마가 좋아하셨다.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셨다고 했다. "우리 딸 서울 큰 병원 간호사야."

그렇게 좋아하실 거면서, 왜 공장에 가라고 했냐고. 등록금 도와달라고 했을 때 왜 안 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입 밖으로 꺼내면 무너질 것 같았다.

엄마도 여자면서 남존여비 사상에 찌들어 사셨다고 본다. 엄마의 엄마도 그랬을 테고, 그 위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딸들에게 "엄마처럼 살지 말고 더 당당하게 살라"라고 한다던데, 우리 엄마는 그런 말조차 하지 않으셨다.

우리 엄마는 안분지족의 삶을 사셨다. 있는 형편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욕심이 없었다. 욕심 많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아버지와는 자주 했던 전화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자주 하지 않았다. 엄마랑은 할 이야기가 없었으니까. 아니,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엄마, 잘 지내세요?"
"응, 잘 있다."

통화는 늘 그렇게 짧게 끝났다.

혼자서 씩씩하게 살겠다던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던 여름날 쓰러지셨다. 평소와 달리 힘이 없고 입맛도 없었다고 했다.

더 자주 들여다보지 못해 속상했다.

이후 엄마는 병원에서 오빠네로, 우리 집으로, 우리 집에서 요양원으로 가셨다. 요양원을 가시겠다고 늘 말씀하셨기에 큰 거부감 없이 요양원에 가셨다. "자식들 짐 되기 싫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

그러나 생각보다 요양원이라는 곳이, 시간이 정체되어 있다 보니 외롭고 힘드셨나 보다. 요양원 3년 차에는 집에 데려가라고 더 자주 말씀하셨다.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는 물었다. "언제 집에 가냐?"

"곧요, 엄마. 조금만 더 계세요."

거짓말이었다. 엄마를 집으로 모실 형편이 안 됐다. 나도, 오빠들도 각자의 삶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85세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버지만큼만 살다 죽겠다고 하시더니, 올해가 만 85세가 된다.

작년 여름부터 식사량이 부쩍 줄었다. 서너 번 병원으로 모셔와 수액을 맞춰 드렸지만 잠깐뿐, 기력을 못 내셨다. 10월부터는 집중 케어하는 곳으로 병실 이동을 했다.

12월부터는 1일 1식 정도로 식사량을 유지하시더니, 어느 날부턴 자리를 보전하셨다. 그렇게 싫어하신 기저귀를 차고 누우셨다. 엄마의 작은 몸이 침대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번 설날에 마지막으로 외박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외박도 못 하고 떠나시려나 보다.

어젯밤, 면회 시간이 끝나고 병실을 나서는데

엄마와 나 사이엔 너무 많은 말들이 쌓여 있다. 하지 못한 말, 하고 싶었던 말, 들었어야 했던 말, 들려주지 못한 말들. 그 말들이 우리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았다.

나는 엄마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미안해요. 제가 더 자주 올걸 그랬어요. 제가 더 많이 전화할걸 그랬어요."

엄마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 이제 알겠어요. 엄마도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다는 거.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는데, 엄마도 꿈이 있었을 텐데. 엄마도 서러웠을 거예요."

엄마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인 것 같았다.


설날이 코앞이다. 엄마는 그때까지 기다려주실까. 마지막 명절을, 마지막 외박을, 우리와 함께해 주실까.

아니면 이미 충분히 기다리셨다고, 이제 쉬고 싶다고, 조용히 떠나가실까.

어느 쪽이든,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엄마와 나 사이에 쌓인 침묵 뒤에는, 서로를 향한 서툰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지 못했을 뿐, 사랑은 분명 있었다는 것을.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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