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쓴 간병 일기/섬망이 멈추고
남편은 새벽녘까지 발버둥 치며 난동을 부렸다. 고함을 지르고, 폭언을 내지르며 날카로운 숨소리와 몸부림으로 병실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였다. 온몸으로 현실에 직면한 몸 상태를 격하게 거부하면서 저항했다. 하지만 잔혹하기 짝이 없는 병마는 그토록 간절한 환자의 소원을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두 다리로 서 보겠다는 의지로 밤을 불태웠건만, 한 번 무너진 몸은 끝내 제 모습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버티고, 병마와 싸우고,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끝에(…) 새벽 다섯 시, 남편은 곯아떨어졌다. 마치 종일 떼쓰다 잠든 아이처럼. 처량하고, 곤하게.
중환자실에서 14일을 보내고 일반 병실로 옮겨 온 첫날 남편은 신고식을 혼란스럽고 비통하게 치러냈다. 얼마나 힘겨웠는지 회복하기까지 꼬박 7시간이 걸렸다. 점심 식사를 나르던 소리에 남편이 눈을 떴다. 무슨 말로 포문을 열어야 될지 말문이 막혔다. 일단 밥을 먹였다. 밥을 먹고 난 후
"어젯밤 일 생각나요?"라고 물으니 눈을 끔벅끔벅하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 남편은 지금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구나.' 쓰러진 후 의식을 잃었고, 수술을 하였고, 눈을 떠 보니 가족들도 없는 낯선 병원이었고, 왜 병원에 있는지도 모를 그에게 현실은 전혀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몸은 꼼짝도 할 수 없고, 인지도 흐릿해 정신은 오락가락했을 테니까. 간호사는 몇 밤만 자면 가족을 만날 수 있다고 회유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고 가족을 만난다는 날짜에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다. 중환자실에 있던 보름 동안을 묻자 남편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젯밤의 일은 섬망으로 겪은 일이었기에 더더욱 기억이 없을 수밖에.
지금 남편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싶어 가슴이 미어져 왔다. 조심스럽게 집에서 쓰러진 순간부터 중환자실로 옮겨지기까지의 과정을 심호흡을 해 가면서 천천히, 얘기해 주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 죽여가면서. 풍선이 부풀면서 막이 얇아지면서 터지듯이, 오른쪽 대동맥에 자리 잡고 있던 꽈리가 터져 버린 것이고, 꽈리가 터지면서 뇌 손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왼쪽 편마비가 온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곁들였다. 의사 선생님이 재활 치료 열심히 받으면 6개월 안에 회복할 수 있다는 말도 꾹꾹 눌러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일러 주었다. 처연한 사연을 전하는 나도 그 기막힌 사연을 듣던 남편도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고, 병실 안에 있던 보호자와 환자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병실 안에 가득 메웠다. 착한 아이가 된 양 남편은 재활 치료를 잘 받겠다고 약속을 했다. 손가락을 걸고.
토네이도 같은 혼돈이 지나갔다고 해서 평온이 오는 건 아니었다. 언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와 아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남편을 1인실로 옮겼다. 어젯밤처럼 다른 환자들에게 불편을 끼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정했다. 병실을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렇게 아들이랑 셋이 1인실에서 12일 동안 같이 생활을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남편의 사업은 무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아들과 나는 오롯이 남편의 회복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1인실에서도 섬망은 두어 차례 더 찾아왔다. 자다가 잠이 깬 남편은 갑자기 여기가 어디냐고 묻더니 112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것이다. 경찰이 어디냐고 묻자 병원이라 하고, 누구와 함께 있느냐 묻자 가족과 있다고 답했다. 눈치 백 단인 112 요원이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남편은 112 요원의 시원찮은 반응이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전화를 들고 거칠게 통화를 이어갔다. 두 번이나 전화를 더 걸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새벽 세 시를 넘긴 시각, 이번에는 딸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가 가는 동안 아들이
“아빠 지금 새벽이고 누나 임신 중이니 놀라게 하면 안 돼요.”
“전화하지 마세요. 아빠. 제발!”
라며 애절하게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딸은 자다가 받은 전화에도 천만다행 침착하게 대응해 냈다.
“아빠, 지금 납치당한 거 아니에요. 옆에 누가 있는지 한 번 봐요.”
그 말에 귀 기울이던 남편은 이내 조용해졌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천진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조금씩, 섬망 증상이 가라앉고 남편이 안정을 찾아갈 무렵, 아들과 나는 교대로 간병을 했다. 평일은 아들이, 주말은 내가.
아랫글은 병원 생활 백일 즈음, 아들이 남편 곁에서 써 내려간 기록이다. 아들 글에다 메모를 살짝 얹어 본다.
정신없는 와중에 아빠가 아침 재활을 갔다.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점심을 반쯤 먹더니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어젯밤 내내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초창기에는 남편이 낮잠을 곧잘 잤다. 왼쪽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휠체어로 이동을 한다고 해도 환자에게는 에너지 소모가 엄청나게 컸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만 다녀와도 금방 기운이 떨어졌다. 하물며 재활을 하고 온 후에 피곤함은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리. 재활만 하는 것도 버겁지만, 실은 재활 사이사이에 기다리는 공백 시간도 제법 많다. 그러다 보니 재활 다녀오면 정신줄 놓고 잠들기 일쑤였다.)
이어지는 당연한 결과 2=재활에 가지 않겠다고 생떼 부리 기다. 말이 좋아 생떼이지 키는 182에 59살 먹은 남자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아침에 이미
“저녁 몫의 치료까지 다 받고 왔다.”
아주 진지하게 말한다. 뻔뻔하게. 눈도 뜨지 않고 말한다.(이때는 남편이 마치 어린아이가 된 양 천연덕스럽게 자기 변론을 해대곤 하였다. 말도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속마음은 재활을 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으리라.)
재활 갈 시간이 됐을 때 억지로 일으켜 세우면 화부터 낸다. 말로 다독여야 하지만 그건 엄마의 전공. 그러나 난감하지 않다. 30년을 그 비결만 봐왔다. 상대가 엄마여야만 먹혔던 아빠 구슬리기, 다독이기, 화내기, 협박하기, 어떻게든 이겨버리기. ‘공동 간병하는 곳으로 보내줄까?’ 엄마는 이 대사로 아빠를 움직였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입원의 목적이 오로지 재활이라지만, 그렇게 울어 젖혔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같지 않았다.
(협박을 안 할 수가 없다. 남편이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재활을 하루에 여섯 가지를 하는 데 한 가지도 하지 않겠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의사 선생님이 당부하기를 뇌졸중 수술 후 6개월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180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환자의 몸 상태가 좌우된다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감언이설을 해서라도 환자로 하여금 재활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역사적 사명이었다. 아들에게도 내게도)
그러나 이제 나도 충분히 한다. 나도 당신의 보호자야. 감정의 40% 정도를 사용한다.
“재활 가야지요?”
수 없이 허벅지랑 가슴팍에 손길을 주고 잠을 깨울 수 있는 수단을 떠오르는 대로 사용한다. 수 없이 허벅지와 가슴팍을 두드리고 손길을 댔다. 손끝이 피부에 닿는 촉감과 작은 숨결의 떨림으로 아빠의 몸이 점점 깨어나기 시작했다.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찬물에 담근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 잠에 취한 아빠를 깨운다. 꿈쩍도 안 할 것처럼 하더니 드디어 아빠가 입을 연다. 한참 만에 답을 한다.
“그래 재활 가자.” ( “그래 재활 가자.” 간병하면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생떼(?)를 자주 부렸기 때문에 재활 갈 시간이 되면 긴장 일색이었다. 재활 안 간다고 버틸까 봐 노심초사했던 아들 마음에 단비가 내린 격이다. “그래 가자.”는)
우여곡절 끝에 아빠를 재활실로 보내고 당장 누구에게라도 방금 전의 사연을 말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직은 힘든 정도도 아니다. 힘든 것보다 이렇게라도 아빠를 움직였다는 뿌듯함이 앞섰다. (맞아. 이때의 뿌듯함 최고조다. 협박을 했든 감언이설을 했든지 간에 환자의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에. 왜냐하면 몸이 좋아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이번엔 이 정도에서 끝났지만, 다음번에 다시 거꾸로 흘러 감정의 60, 70, 80을 사용해야 한다면, 할 수 있을까. 그 공허함을 이겨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다. 어떻게든 내 선에서 끝낼 것이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와도 여기서 벌어지는 일로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을 것이라서, 일기도 쓰지 않을 것이다. 완주가 우선인 싸움이니. (아들이 힘겨움을 혼자서 감당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던 기록이다. 만삭인 누나한테 하소연을 할 수 있었으랴. 엄마한테 넋두리를 할 수 있었으랴. 오로지 글을 쓰면서 버텨 낸 아들이 기특하다. 초창기에 아들과 교대 간병을 하였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고 지금만큼이라도 남편이 회복을 한 것이리라!)
뇌 병변 환자들은 시술이나 수술 후 6개월이 중요한 시기다. 그 180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환자 몸 상태의 호전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랑 아들은 6개월이란 숫자에 꽂혀 있었다. 재활을 빠트리지 않고 가게 하는 게 일 순위였다. 남편은 그때 거의 혼이 나간 듯한 상태였다. 인지도 떨어져 있었고, 재활의 의미조차 모를 때였다. 정상인도 운동은 버겁다. 하물며 몸도, 마음도 부서진 사람이야 오죽할까.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의 몸이 시나브로 힘을 되찾고, 정신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의 낮은 숨소리가 평온함을 되찾는 듯했다. 담당의사와 재활 치료사들이 가족 간병이라 호전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병원에서 안면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던 사실이었다. 가족 간병의 효과가 환자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스며들었음이다.
하지만 가족 간병은 절대로 만만치 않았다. 병실 안의 소리와 냄새, 그리고 서로의 숨결까지 공유하는 매 순간이 감정의 한계를 시험했다. 감정의 선을 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환자도, 간병인도.
이 글은 아들의 허락을 받은 후 올린 글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