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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사돈과 정을 버무리다

김장을 돕기 위해 기꺼이 사돈댁에 같이 간 아들

by 능수버들

이른 아침에 아들과 함께 사돈댁 초인종을 눌렀다. 예상치 못한 아들의 등장에 사돈 내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어머나! 김장 도와주러 사돈총각까지 오다니 고마워요!"

라며 한껏 반겨주셨다. 거실 한가득 김장하는 날답게 온갖 양념 재료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채반에서 몸을 어슷 세우고 물기를 빼고 있는 배추, 소쿠리에 가지런히 담겨 있는 갓과 쪽파. 스테인리스 통에 한가득 담겨 있는 싱싱하고 단단한 무. 준비된 재료들 속엔 사돈 마님의 손길과 고생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일요일인데 서둘러 오느라 애썼다면서, 돈 마님이 금세 쑥 인절미를 들기름에 구워서 내오시고. 간단하게 커피 타임을 가지면서 들기름 향처럼 고소한 안부를 서로 주고받았다.

"고은이 외할아버지 한동안 운동 쉬고 있어서 애가 탔습니다. 보름 전부터 헬스장 하루도 빼지 않고 다녀서 불안이 말끔히 사라졌답니다. 한강 책 <그대의 차가운 손>도 읽어내고.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암이요. 운동 반드시 하셔야지요. 의지력이 대단하시니 잘해 내실 거예요."


아들과 바깥사돈은 강판에 무를 채 치고. 사돈 마님의 이웃사촌과 나는 쪽파와 붉은 갓을 짤막하게 썰었다. 대파를 썰 때 매운 향이 코를 찌르며 눈물과 콧물이 흘렀다. "김장이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나요. 흑흑!"이라며 일부러 울먹여 보였더니, 사돈 마님은 "김장 눈물겹지요"라고 응수하더니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전에는 김장 2–3백 포기가 기본이라며, 마당에서 찬바람과 싸우며 사흘은 족히 해야 끝이 났다는 이야기까지 웃으며 나누다 보니,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재료 준비는 어느새 끝났다.


김장전용 비닐을 거실 바닥에 쫘악 펼쳐놓고 그곳에 무채와 고춧가루(굵은 고츳가루, 고운 고춧가루, 청양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렸다. 아들의 굵은 팔뚝 근육들이 실룩실룩거리는 사이, 사돈 마님은 새우젓갈을 비롯하여 갖가지 양념들을 넣고, 고춧가루가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한 그릇 더 넣고, 생강이랑 마늘 이 정도면 되겠냐고 하더니 더 넣기를 서너 번 반복하기를. 양념소를 치대던 아들은, 진땀이 난다고 했다. 김장속은 남자가 버무려야 된다며 내년에도 오겠다는 아들. 속을 넣으려고 하니 사돈 마님이 극구 말렸다. 와준 것만 고맙고 가장 힘든 일을 해 냈으니 안 해도 된다면서.


준비 태세로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는 배추와 지금 막 버무려 놓은 맛깔스러운 양념소를 눈대중해 보던 사돈 마님. 살짝 부족할지도 모르니 배추의 속을 가볍게 넣으라고 주문한다. 김장김치는 속을 적다시피 넣어야 깔끔한 맛이 난다면서. 그러나 김장하다가 속이 부족하면 난감하 긴장들 하라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래된 기억이 불쑥 되살아났다. 40년도 더 된 어느 김장 날. 우리 가족 모두 김장에 참여하였다. 고만고만한 10대였던 남동생들 셋과 10대 후반이었던 나 그리고 아버지랑 김장을 도왔다. 엄마의 지휘진두 아래 다들 열심히 속을 넣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엄마가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이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배추가 저리 많이 남았는데 속을 터무니없이 많이 넣었다면서 한숨을 들이쉬고 내 쉬던 엄마, 우리 모두를 중범죄자로 몰아붙이셨다. 그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의문의 1패를 당한 우리는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해 보는 김장이었고 엄마의 분부대로 이행했을 뿐이었으니.


그 시절 김장은 긴장과 두려움이었다. 틀리면 혼나고, 실수하면 눈치부터 봐야 했던 시절. 지금이야 배춧속이 모자라면 즉시 더할 수 있지만, 오래전 그때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엄마가 그토록 화가 났던 이유를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얼마나 기막힌 대참사였는지를.





하지만 오늘의 김장은 다르다. 서툴러도 웃고, 부족해도 함께 채워준다. 가족이란 이름은 다르지만, 따뜻함의 결은 더 깊었다. 과거의 상처를 오늘의 온기가 덮어주는 기분이 들었다. 김속을 넣는 사이 김장 날의 백미, 수육이 등장했다. 두툼한 수육에 갓 버무린 속을 얹어 입에 넣으니, 짭조름하고 담백한 맛이 막걸리와 어우러져 속까지 든든하게 채워졌다. 노동에는 역시 막걸리지! 상을 차려놓고 본격적으로 먹는 음식보다 새참식으로 먹는 음식이 훨씬 맛있는 듯하다.


사돈아가씨까지 합세해서 속을 넣다 보니 다섯 박스가 순식 간에 끝이 났다. 김장 후 어지럽혀진 자리를 아들과 바깥사돈이 정리정돈을 싹 다 해주었다. 힘든 일도 즐기면 놀이가 되고, 놀이도 억지로 하면 중노동이다. 우리는 힘든 일을 놀이처럼 즐겁게 해냈다. 아들이 내년에도 기꺼이 김장에 동참하겠다고 예약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정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서 생기지만,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데서 더 깊어진다. 김장 마치고 헤어지기 직전, 우리 사돈 마님은 신중하게 이것저것을 챙겼다. 친정 오빠가 서리태 농사를 지었는데 유독 단맛이 강하다면서 한 보따리를, 서리태로 만든 콩자반도 타파통에 한가득 담았다. 수육 두 덩이에 도 한 사발을 챙겨주시고. 사돈 마님의 손길은 언제나 넉넉하고 진심이 깊다. ‘고은이 외할아버지 몫이라며’ 건네는 음식 안에는 걱정, 응원, 위로가 함께 담겨 있다. 피붙이도 아닌데, 이렇게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 또 있을까.

참,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사돈 마님과 김장을 같이 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재작년에 남편과 함께 병원 생활을 할 때 사돈 마님이 김장 김치 한 통을 보내왔다. 작년에 김장 즈음해서 사돈한테 전화했다.

"올해도 김장해서 우리 한 통 주실 건가요?"

"당연히 줘야지요.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하면 되니!"

"김치를 준다 하니 제가 돕겠습니다. 만약 못 오게 한다면 김치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사돈이 파안대소하더니

"아이고 참 내, 별소리를 다 하시네요. 그냥 받아도 됩니다. 고은이 외할아버지 간병하는 것만도 힘겨운데 김치 정도 그냥 받아도 돼요."

그 말에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목이 꽉 잠겼다. 진심은 이렇게 불쑥 가슴을 파고드는 순간이 있다. 그저 김치 한 통이 아니라, 그 마음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얼마나 푸근해든지. 어느새 사돈 내외분은 마음을 기대어도 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가,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온기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김장 김치가 천천히 익어가듯, 우리의 관계도 시간이 더해질수록 더 깊어져 간다. 이런 고귀한 인연이 내 삶을 견디게 한다. 이번 달 말에 세 가족이 모인다. 손녀 생일파티 겸 송년회를 하는 자리다. 벌써부터 연말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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