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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Aug 21. 2024

그해 겨울, 그녀


그해 겨울은 예년보다 일찍 찾아왔다. 처음엔 가벼운 눈발이 날리더니, 곧이어 밤새 차가운 기운이 대지를 얼려버렸다. 내가 그녀를 만나기로 한 그 주말, 다행히도 한파는 잠시 물러가 쌀쌀한 정도의 날씨였지만, 겨울이 이미 깊게 자리 잡은 듯한 기운은 피할 수 없었다. 나무들은 이미 앙상한 가지들만 남긴 채 잎을 모두 떨궜고, 잔디밭은 생기를 잃은 채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세상은 마치 깊은 겨울잠에 들기 전, 마지막 숨을 고르는 듯, 차분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날의 쌀쌀함은 나에게 1년 전 오늘을 떠올리게 했다. 바로 그날, 현식이네 신혼집 집들이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었다. 집들이를 돕기 위해 나는 일찍 도착했는데, 그녀도 이미 와 있었다. 현식 아내가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동료라며 그녀를 소개해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딘가 지친 듯 보였다. 눈 밑은 다크서클로 움푹 꺼져 있었고, 말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묘한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특별히 꾸미지 않은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지나치게 마른 체구 탓에 그녀가 더욱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는 어딘가 모를 섬세함과, 깊은 고독이 느껴졌다. 첫인상은 마치 겨울날의 쓸쓸한 풍경처럼 차갑고도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마치 그해 겨울처럼 차갑게, 그러나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기며 시작되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상태 부부와 용화 부부, 그리고 정훈이 커플이 하나둘씩 신혼집에 도착했다. 처음엔 조용하던 집안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금세 북적거림으로 가득 찼다. 각자 준비해 온 선물 꾸러미들이 쌓이고, 웃음과 대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며 썰렁했던 신혼집은 활기로 가득 찼다. 현식이와 그의 아내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모두와 어색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부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현식의 아내의 지인으로 초대된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친분이 없었기에, 대화에 끼지 않고 오로지 음식 준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그 고독을 선택한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음식이 모두 준비되고 나자, 자연스럽게 부부끼리, 커플끼리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온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분위기를 주도하던 현식이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이, 솔로는 솔로끼리 앉으세요!“


그 말에 모두가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고, 나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앉게 되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차 대화로 들어갈 준비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집들이는 여느 집들이처럼 시끌벅적하게 진행되었다. 대화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누구는 요즘 트렌드에 관해 이야기하고, 누구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중구난방으로 시작된 대화는 금세 힘을 잃고, 이내 새로운 주제로 이동했다. 그때 정훈이가 무심한 듯 말을 던졌다.


"우리는 평생 같이 살 거야. 이혼? 그건 양쪽 다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야.“


그의 말은 장난스럽게 들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은근히 자신의 관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분위기는 다소 어색해졌고, 대화는 잠시 끊겼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저기요.”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작은 폭탄처럼 터져 나와 방 안의 모든 시선을 끌었다.


짧은 웃음소리들이 찰나에 끊기고, 모두가 일제히 그 말을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정적 속에서, 방 안은 일시적으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의 무게는 꽤 무거웠다. 사람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신들의 대화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를 보니,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지나치게 힘을 주었는지, 입술 주변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무언가가 가득 차 있었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단지 그 순간, 그녀가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9시가 되자, 잡채, 갈비, 피자, 셀러리 등 다양한 음식이 차려졌고, 모두 몇 번씩이나 접시를 비웠다. 술기운이 오른 사람들은 천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음식에 손대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흘러 11시가 되자, 그들 대부분은 돌아갔고, 이제 현식 부부와 나, 그리고 그녀만이 남아 신혼집의 뒷정리를 돕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눈에 띄게 술에 취한 상태였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더욱 짙어졌고, 얼굴은 창백함을 넘어 마치 생기를 잃은 듯했다. 뒷정리가 끝난 후, 우리는 모두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기로 했다. 그녀는 술기운에 혀가 풀려 있었지만, 발음은 여전히 정확했고, 목소리 속에 배어 있던 날카로움은 더욱 예리해졌다. 마치 방어막을 벗어 던진 것처럼 무방비 상태인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5살이 많다고 했다. 수학 교사로서, 지금의 학교는 2년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선택한 곳이라고 했다. 그녀는 전남편을 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혼자 살아가는 삶에 점차 만족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혼자 살아가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독서는 그녀에게 점점 더 큰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했다. 그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강렬한 해방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묘한 친근감을 느꼈다. 마치 그녀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가 일종의 변화를 겪었음을 직감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직관적인 깨달음이었다. 나도 책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변화가 낯설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나보다 더 깊은 고통을 통해 그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 지식은 그녀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연민이 아닌, 진정한 이해였다.


그날 집들이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화는 점점 조용해졌고, 마침내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뜻밖의 위안과 온기를 찾은 우리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얼마 후, 우리는 파주 외곽에 위치한 헤이리 마을의 한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날의 분위기에 취한 듯, 그녀는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과 성격 차이로 별거 중이었다고 했다. 남편은 항상 피곤해했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부렸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고 했다.


남편은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가끔 함께 산책 하거나 여행을 가보기도 했지만, 남편은 쉽게 지치고, 심지어 아파서 드러눕기까지 했다. 결혼 전 그녀에게 구애할 때는 활기찼던 남편이, 결혼 후에는 항상 아프기만 했다. 병원을 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내성적인 남편을 위해 그녀는 손님을 초대하고, 모임에 데리고 나가며 남편을 도우려 노력했지만, 남편은 그 모든 것에 무심했다. 그녀는 남편이 피곤해 보일 때마다 욕조에 물을 받아주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껏 차려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 모든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보살핌에 강박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결국 긴장과 피로로 침대에 누워있는 일이 잦았다.


그녀도 지쳐갔다. 결혼은 실패라고, 더 이상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별거를 결심했고, 그녀는 그 집을 떠나 혼자만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고 했다. 지금의 모습을 너무 오래 가지고 있었다며, 그렇게 과거를 털어놓았다.

별거 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A 씨 부인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남편분이 돌아갔습니다. 지금 남편이 계신 곳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떠난 집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집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임시 거처처럼 보였다. 더 건조하고, 칙칙한 기운이 감돌았다. 벽지는 곰팡이로 누렇게 변했고, 바닥은 먼지로 덮여 있었다. 천장에는 줄이 매달려 있었다. 남편은 그렇게 혼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난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어. 왜 그가 아픈지, 원망스러웠을 뿐이야.“


냉기가 감도는 영안실에서 그녀는 하얀 천으로 덮인 남편을 마주했다. 천을 열었을 때, 그녀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남편의 시신은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몸은 작게 쪼그라들었고, 얼굴은 마치 얇은 종이로 만든 가면 같았다. 눈은 깊이 패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옷은 기괴할 정도로 컸고, 몸은 그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정말로 혼자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정기 모임을 가졌다. 그녀를 생각하면 모호한 감정이 들곤 했고, 안쓰러우면서도 내 안에 깊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나는 이유 없이 아파졌다. 병원에 가봤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되었고, 그녀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어떻게 지내냐며 한번 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무엇을 마시겠냐는 간단한 질문에도 어두운 얼굴로 대답을 머뭇거렸다. 내 기억 속의 그녀는 언제나 눈가에 잔주름을 지으며 웃는 모습이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대답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마치 분장을 지우다 만 배우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인상을 주었다. 이마에 주름을 깊게 그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온몸에 바늘이 돋아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결국 나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카페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며칠 후,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음성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나는 검은 사주래. 그래서 두려워... 내가...“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그 여운은 내 마음 깊숙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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