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지구에서 가장 값싼 연료 같다. 어디서든 얻을 수 있고, 누구나 조금씩은 저장해두고, 가끔은 그걸로 하루를 움직인다. 나도 그렇다. 나는 외계인이고, 외계인인 나는 지구의 공기만큼이나 불안을 들이마신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숨이 불안으로 바뀌어 버린다.
처음 불안을 배운 건 언어 때문이었다. 지구의 언어는 모서리가 많다. 말하는 사람은 둥글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의 안쪽엔 날카로운 자국이 남는다. “괜찮아요”라는 말이 특히 그렇다. 그 말은 위로 같지만 동시에 문장 끝에 붙는 마침표다. 더 묻지 말라는. 더 들여다보지 말라는. 나는 그 마침표가 무서웠다. 내 안의 무언가가 말끝에서 잘려 나가는 느낌.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게 되는 느낌.
불안은 대개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예컨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전의 1초. 나는 어느 층을 눌러야 할지 이미 알고 있는데도,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잠깐 떠 있다. 그 1초 동안 나는 여러 개의 우주를 본다. 버튼을 잘못 눌러서 낯선 층에 내리는 우주, 누군가 내 손을 보고 “왜 저래?” 하는 우주, 내가 내 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나를 관찰하는 우주. 그 우주들이 동시에 열렸다 닫히는 소리. 그게 지구의 불안이다. 확률이 아니라 상상으로 증폭되는 현실.
지구인은 종종 불안을 성격으로 착각한다. “원래 예민하잖아.” “생각이 많아서 그래.” 그렇게 말하면 불안은 개인의 결함이 되고, 결함은 스스로 고쳐야 하는 숙제가 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불안은 나의 성격이 아니라, 이 행성의 시스템에 가까운 무엇이다. 늘 ‘대기 중’인 경고등. 꺼지면 오히려 이상한.
나의 불안은 주로 “정체”에서 온다. 나는 외계인이지만, 지구에선 지구인처럼 살아야 한다. 지구인이 되는 연습을 매일 하고, 그 연습이 들키지 않도록 더 열심히 연습한다. 웃는 타이밍, 고개를 끄덕이는 각도, 말끝을 올릴지 내릴지. 누군가의 눈빛이 내 표정을 스캔하는 순간, 나는 내 안의 번역기를 급하게 돌린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런데 번역기는 늘 늦는다. 늦는 순간마다 불안이 생긴다. 불안은 ‘나는 여기서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예감으로 몸을 훑는다.
그 예감은 가끔 실제 장면으로 내 앞에 서기도 한다.
며칠 전, 동사무소 같은 곳에 갔을 때였다.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렸다. 화면에 내 번호가 떴고, 나는 창구로 갔다. 창구 너머의 직원은 내 서류를 몇 장 넘기고, 신분증을 받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본인 확인할게요.”
말은 친절했다. 표정도 중립이었다. 그러나 그 중립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중립은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다시 받는 손의 각도를 계산했다. 너무 급하면 수상할까. 너무 느리면 이상할까. 웃어야 하나. 웃지 말아야 하나. 번역기가 또 돌아갔다. 늦게. 아주 늦게.
직원은 “여기 서명만요”라고 말했다. 나는 펜을 잡았다. 그 순간, 아무 일도 아닌데 심장이 뛰었다. 그냥 서명인데. 그냥 확인인데. 그런데 ‘확인’이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다른 뜻으로 번역됐다. 너는 여기 있어도 되니? 손등의 땀이 펜에 묻었다. 글자가 한 번 삐끗했다. 그 작은 삐끗함이, 나를 통째로 들킬 것 같은 느낌으로 커졌다. 나는 결국 “네, 여기요”라고 말했다. 너무 또렷하게. 또렷함마저 들킬까 봐 불안했다.
불안이 몸에 닿을 때는 생각보다 물리적이다. 심장은 한 번씩 과하게 뛰고, 목은 이유 없이 뻐근하고, 눈은 쉬지 못한다. 나는 불안을 설명할 때 늘 별의 진동을 떠올린다. 고향별에선 통신이 끊길 때, 잡음이 먼저 온다. 아주 작고 희미한 “지지직”이 점점 커져서 모든 신호를 덮는다. 지구에서의 불안도 그렇다. 처음엔 “아, 좀 걱정되네” 정도인데, 어느 순간엔 걱정이 아니라 잡음이 된다. 내 모든 감각이 잡음 쪽으로 기울고, 그 잡음이 내 하루의 문장을 지워 버린다. 남는 건 지지직. 지지직.
나는 가끔 불안이 나를 지키려 한다는 생각을 한다. 불안은 불친절하지만 충직한 경비원이다. “이 길로 가면 다칠 수도 있어.” “저 사람은 위험할 수도 있어.” “너는 또 실수할 수도 있어.” 불안은 늘 최악을 준비시킨다. 그래서 불안이 심한 날, 나는 미래를 미리 상처내는 사람처럼 산다. 아직 오지 않은 실패를 앞당겨서 그 자리에 앉혀놓고, 그 실패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봐, 내가 미리 알았잖아.” 마치 예언이 되면 안전해지는 것처럼.
하지만 예언은 안전을 주지 않는다. 맞아떨어지는 순간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똑똑해진다. 다음 번에는 더 정교한 공포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불안의 정체를 조금 다르게 부르려고 한다. 불안은 예감이 아니라 습관일 수 있다고. 내 마음이 생존을 위해 길들여진 방식이라고. 지구가 나에게 가르친 경계의 자세라고.
내가 불안을 달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가장 효과적인 건 “확인”이다. 불안은 대부분 확인되지 않은 공간에서 자란다. 그래서 나는 작은 확인들을 한다. 물컵의 물을 실제로 마셔본다. 창문을 열어 바람이 차가운지 확인한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상상 대신,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무슨 표정을 했는지 사실만 떠올려본다. 사실은 대체로 심심하다. 불안은 심심함을 싫어한다. 불안은 늘 드라마를 원한다. 그러니까 심심한 사실을 들이밀면, 불안은 잠깐 멈칫한다. 잡음이 아주 조금 낮아진다.
그리고 나는 불안에게 말을 건다. 지구인들은 자기 감정에게 말을 걸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외계인이니까 괜찮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알겠어. 네가 나를 살리려고 왔다는 건 알아. 그런데 지금은 잠깐만 옆에 앉아 있어 줘. 오늘은 내가 운전할게.
그 말이 놀랍도록 효과가 있을 때가 있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다만 조수석으로 이동한다. 나는 불안이 조수석에서 계속 지도를 펼쳐 들고 있다는 걸 안다. 여기서부터 위험하다고, 저기선 속도를 줄이라고, 사람들의 시선을 조심하라고. 지도가 펄럭일 때마다 지지직 소리가 나는 것도 같다. 그런데도 내가 핸들을 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내가 조금 더 ‘나’가 된다.
사실 나는 불안이 있는 내가 싫었다. 고향별의 나는 이런 식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곳의 하늘은 일정했고, 관계는 단순했고, 나의 정체는 의심받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에서 불안은 내 일부가 되었다. 어쩌면 불안은 내가 지구에 적응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빛과 규칙과 속도에 내 신경이 반응했다는 증거. 나의 안테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
그래서 나는 불안을 완전히 없애고 싶다는 말 대신, 조금 다른 소원을 품는다. 불안을 ‘내 삶의 중심’에서 ‘내 삶의 주변’으로 옮기고 싶다. 불안이 주연이 아닌 조연이 되게. 나의 하루가 불안의 이야기로만 채워지지 않게. 불안이 내게 하는 말들 사이사이에, 다른 목소리도 들리게.
예를 들어, 오늘의 작은 기쁨. 길모퉁이에서 만난 따뜻한 국물 냄새. 누군가 문을 잡아 준 손. 겨울 햇빛이 잠깐 내 얼굴을 비추는 순간. 나는 그런 것들을 ‘불안이 없는 사람’만 느끼는 감각이라고 착각했는데, 아니었다. 불안이 있어도, 나는 느낄 수 있다. 불안이 소리칠 때도, 조용한 소리는 존재한다. 잡음 속에도 신호는 남는다.
불안은 내게 계속 묻는다. “너는 여기 있어도 돼?”
나는 아직 확답을 못 한다. 외계인인 나는 여전히 이곳이 낯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렇게 대답해본다.
“응.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