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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Oct 19. 2023

'삼성' 발음이 안됩니다.

사는 이야기

성우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다. 성우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우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성우를 모집하는 방송사에 입사하는 것이다. 총 6개의 방송사에서 공채성우를 모집하고 있다. 모집간격은 방송사별로 3년에 한 번씩 모집하며, 공중파에서는 라디오드라마, 그 외 방송사에서는  애니메이션 위주로 3년간 수습기간을 거치게 된다. 또한 공중파는 외화 및 애니메이션을 통해 수습기간을 거쳤으며, 3년의 수습기간을 거치면 프리랜서로 전환되어 한국성우협회의 정회원으로 등록된다. KBS와 MBC에서는 자체적으로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어, 성우지망생은 이곳에서 훈련하기도 한다. 또 유명 성우들이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기도 한다. 


자격조건을 보면 남성 성우는 군필 및 예비역 조건을 기준으로 만 19세 이후부터 지원이 가능하며 여성 성우는 만 19세 이후부터 지원이 가능하다. 일본과 달리 만 19세 이전의 미성년자 및 아역 성우의 모집은 법령으로 금지되어 있다.


훈련과정은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교육과정을 통해 훈련하고 방송국입사 시험을 치러 합격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만은 않다. 아무리 열심히 훈련한다 하더라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대본을 보고 연기를 해야 하기에 연기력이 있어야 하며, 내레이션을 하기 위해서는 아나운서와 같이 정확한 발음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다. 어떤 이는 목소리가 너무 좋은데 연기를 못하고, 어떤 이는 연기를 너무 잘하는데 발음이 부정확해서 잘 들리지 않는다. 나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었는데 연기력도 아니고 목소리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 시옷발음이 문제였다. 


'삼성'이 '쌈 떵'으로 발음된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삼성발음이 안되는지. 만약 삼성전자에서 광고의뢰가 들어오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다. 엘지만 받아야 하나, 우리나라 가장 큰 회사 광고를 못할까 봐 걱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떡줄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나 혼자서 열심히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나만의 상상을 했다. 나의 상상은 현실을 덮었고, 미래를 세우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발음을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혀의 위치를 바꿔가며 발음도 해보고, 숨을 참으며 발음 해보고, 삼 과 성에 간격을 두어 발음해 보고, 빨리 발음해 봐도 삼성은 발음되지 않았다. 

심리적이 원인도 찾아보았다. 내가 삼성이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발음이 안 되는 것을 수도 있다. 내 머릿속에서 삼성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음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일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영어 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혀 밑에 설소대가 있는데 이것을 제거하면 혀 짧은 소리가 없어지고 발음이 잘된다고 했다. 해결방법을 찾은 듯 기뻤다. 의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내가 삼성을 발음할 수 있다면, 나는 성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산에서 제일 유명한 치과에 예약을 했다. 그날은 병원에 행사가 있었는지 어수선했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을 꾹 다물고 침묵 속에 있는 사람들 속에 나 홀로 웃고 있었다.  내 이름이 호출되고 진료실에 들어가 의자에 누웠다. 눈앞모니터에는 미리 찍어둔 엑스레이가 내 치아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갑자기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발맞춰 들어왔다. 아홉 명의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내 주변을 둘러쌌다. 알 수 없는 불암감에 위축되었다.  그리고 원장님이 아홉 명의 하얀 가운을 헤치고 들어와 내 머리맡에 앉더니 물었다. 


"오늘 의대생들 실습견학이 있어 양해를 구할게요." 


나는 실험용 쥐가 된 거 같았다.


"자! 어디가 불편하세요"


쏘아보는 하얀 불빛에 눈이 부셨다.  누운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니 스무 개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편하고 두려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머뭇거리고 대답을 했다.


"발음이 안됩니다."

"통증 때문에 말하기가 힘드세요? 어느 쪽입니까?"

"혀, 혀... 요"

"네? 혀가 어떻게요?"


부끄러워 얼굴이 불타는 거 같았다. 


"삼성 발음이 안됩니다."


나를 둘러싼 하얀 가운들이 입을 막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음~ 이라며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나는 계속 증상을 설명했다. 


"혀가 짧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혀 길이가 정상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설소대를 잘라야 할까요?"


선생님은 대답대신 간호사를 불렀다. 


" 저기~ 자 좀 가져와봐요"


하얀 가운중에 한 명이 '풋'하고 웃고 말았고, 결국 모두들 웃었고 나도 웃었다. 

간호사가 자를 가져오고 선생님은 혀를 쭉 내밀어보라고 했다. 자로 혀길이를 재 보더니 정상이라고 한다. 나도 선생님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선생님이 말했다.


" 또 어디 불편한 곳은?"

" 없습니다."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선생님은 아홉 명의 흰 가운들과 진료실을 떠났다. 

허무했다. 결국 원인을 못 찾았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성우가 될 수 없을 거라 좌절했다. 울적한 기분과 함께 어색한 공간을 떠나 계산을 하기 위해 데스크에 갔다. 


"계산할게요"


간호사는 무엇이 즐거운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지막 희망을 놓쳤다는 기분에 간호사의 눈빛이 불쾌했지만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원장님이 그냥 가시래요"





살면서 무언가에 꽂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다. 꽂혔다는 것은 나름의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내 열정과 노력을 그곳에 쏟아부은 것은 어쩌면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삼성'이라는 단어에 꽂혔을까. 나는 왜 그렇게 열정적으로 집중했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에 꽂힐 수 있다는 것은,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행복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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