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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신자 Mar 23. 2022

다름에서 틀림으로

왜 우리는 혐오하게 되었는가?

두 사람이 유명한 맛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는데, 나이가 좀 있으신 분(아버지뻘 되시는)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야. 여기는 다른 집과는 틀리네!"

음식이 진짜 맛있다는 감탄을 다른 음식점과 비교해서 표현하려는 의도였지만, 그 감탄을 들은 상대방은 어떤 단어에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교정을 그가 시도합니다.

"선생님,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


요 몇십 년간 일상의 언어를 바꾸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어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저희'를 '우리'로, '틀림'을 '다름'으로 교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를 우리로 바꾸려는 노력은 과도한 겸양에서 벗어나 나와 우리의 자존감을 찾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틀림에서 다름으로 바꾸려는 노력은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움직임의 근간에 '상대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주의는 각자의 생각이 옳으니, 상대방의 생각도 옳다는 존중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움직임에서 시작합니다. 정말로 좋은 시작입니다. 자신의 아집을 버리고 내 생각 안에 갇혀있던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이처럼 좋은 도구가 탄생하다니. 이보다 기독교적인 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이 좋은 상대주의가 남발되니 문제가 생겨납니다. 상대주의는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점령해나갑니다. 옮고 그름을 논해야 하는 자리에 상대주의가 찾아와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외칩니다.


다름의 강조가 오히려 틀림을 유발하게 된 것입니다. 다름을 이해하려는 도구가 오히려 다름의 강요가 되어버렸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라는 말속에는 '저는 당신의 실수를(혹은 오래된 습관을) 이해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말이 틀렸기 때문입니다'라는 전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무슨 이런 아이러니가 다 있습니까? 틀림을 다름으로 바꾸려는 자가 오히려 틀림을 지적하다니요.


이뿐만이 아니라 남발된 상대주의는 옳고 그름을 말하는 입에 재갈을 물렸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은 옳지 않아!'라 말하지 않습니다. 남들의 눈에 자신이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벽창호'로 비치기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남발된 상대주의는 이것을 어떻게 대신할까 고민했고, 그 결과로 '옳고 그름'이라는 이성적 단어를 '좋고 나쁨'이라는 감정적 단어가 대신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알다시피 감정은 교류할수록 확대합니다. 좋은 감정이 주변에 전염되면서 커지듯, 나쁜 감정도 동일하게 확장합니다. 옳고 그름은 죄와 사람을 분리시켜 판별하였지만(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좋고 나쁨은 죄에서 발전하여 사람, 나아가 그 사람이 속한 집단까지 나쁨을 전염시켰습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는 '혐오'라 부릅니다.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하지만 다름이 틀림을 넘어서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죄와 사람은 물론이고 특정 집단까지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혐오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이웃을 혐오하기 시작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구별되어야) 할 백성이 나와 이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시류에 저항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 부유하는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항하는 자, '프로테스탄트'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발된 상대주의에 맞서 일어나야 합니다.

다름이 틀림을 집어삼킨 시대에, 우리는 다름으로부터 틀림을 되찾아야 합니다.

혐오의 시대에 우리는 분별의 시대로 되돌아 가야 함을 역설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 이웃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혐오하고 옳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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