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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신자 Mar 19. 2024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시편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늘 이러합니다.
《시편 10편 4절》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로 변증을 시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옳고 그름에 대한 법칙'(자연법)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이 법칙을 부인하는 사람조차도 은연중에 옳고 그름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옳고 그름에 대해 알면서도 옳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른 행동을 하고 옳은 행동이었다 변명할 따름입니다.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외침은 사실 이런 변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른 행동을 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는 죄책이 찾아옵니다. 꼭 법에 저촉된 것이 아니더라도 이 죄책은 계속해서 우리의 내면을 공격합니다. 심지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아무도 모르는데, 내 안의 죄책이 저절로 작동하여 스스로를 공격합니다. 이런 죄책에서 자유롭기 위해 우리는 자신에게 속삭입니다. '내 은밀한 죄를 벌하는 이는 없어. 지금 나를 괴롭히는 죄책은 내가 받은 상처이고 슬픔이야. 나쁜 일이 전혀 아니니 그딴 여리고 연약한 감정을 버려!'

세상은 허무주의, 이성과 양심의 부정, 감정과 감성의 극대화를 통해 이런 우리의 말들을 합리화합니다. 세상에 속한 모두가 합리화로 무장하여 외칩니다.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른 행동은 그르다고 인정합니다. 심지어 아무도 모르는 내 죄를 벌주시는 이에게 직접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에서 어떻게 자유할 수 있을까를 계속해서 고민하며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의 죄까지도 정결하도록 인도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외칩니다. '벌주는 이가 여기에 있다! 벌주는 이와 벌의 심판에서 구원하는 이가 동일한 분이다! 그런 분이 통치하는 나라가 이미 왔고, 나라의 완성이 정말로 가까이 왔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벌주는 이가 상 주는 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경주하여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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