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나아가는 것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10번 정도 새로 썼습니다. 처음에는 빈약한 설정 때문에, 그다음에는 이어지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 설정상의 오류로 인해, 순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렇게 새로 쓸 때마다 저는 절망과 마주합니다.
절망의 종류는 이렇습니다. 내가 이렇게나 부족한 글쟁이였나, 소설이 이렇게 엉성하게 설정되었나, 이 소설을 완전히 포기할까. 사실 지금도 단어 하나마다 절망 하나와 만나고 있습니다. 역시 저는 한없이 부족한 글쟁이입니다.
격언 중에 '일보후퇴 이보전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걸음 후퇴한 것은 두 걸음 전진을 위한 포석이다." 뜻을 풀이하면 대충 이렇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이지요.
저는 수십 번을 고쳐 쓴 지금에서야 이 말의 해석이 틀렸다고 깨닫습니다.
저는 글을 모두 지웠습니다. 이것은 그냥 보기에 한 발자국 뒤로 걸은 것입니다. 이후 글을 씁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저는 제자리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한 발자국 뒤로 걸은 것은 사실 앞으로 걸은 것입니다. 소설의 완성이라는 것에는 뒤로 후퇴한 것이지만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에는 한걸음 전진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일보후퇴의 여건은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혼란이지요. 춘추전국의 혼란, 여말선초의 혼란, 사사기 끝의 혼란, 서양 중세 말기의 혼란 등 역사상 무수히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이보전진을 했습니다. 제자백가의 등장, 조선의 건국, 사울 왕의 등장, 르네상스 운동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일보후퇴 이보전진에서 중요한 것은, 후퇴하는 그곳이 과연 어디냐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구성한 세계관과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가치에 후퇴하여 글을 다시 시작합니다. 역사적 혼란에서 후퇴하는 곳은 그 근본 가치였고 그것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후퇴해야 할 곳은 바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구성하는 정의입니다.
비록 눈으로 보기에 뒤로 간 것 같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우리도 곧 행복해지기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