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구해 줄까?

시편

by 한신자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빗대어서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면서 얄밉게 빈정댑니다.
"그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님이 그를 구하여 주시겠지. 그의 주님이 그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니, 주님이 그를 건져 주시겠지" 합니다.
《시편 22편 7~8절》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질문 중 가장 강력한 질문이 오늘 본문의 빈정거림 속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끔찍한 재난을 경험하고, 우리의 부르짖음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1755년 리스본에서 엄청난 지진이 발생합니다. 리스본 대지진 이전까지 재난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은 '하나님의 심판'에 가까웠습니다. 재난을 당한 자들은 분명 죄를 범했기에 심판을 당해 마땅한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리스본 대지진은 이런 인식을 아주 크게 깨트렸습니다. 기독교 행사 기간 일어난 재난으로 엄청난 수의 교회가 파괴되고 신자들이 죽었습니다. 반면에 동일한 지역의 동일한 재해를 당했음에도 홍등가 지역만 지진의 피해가 경미했습니다.


성경에도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두 사도의 생사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헤롯왕에 의해 죽임 당합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같은 왕의 손에 잡혀 죽음의 위기에 처하지만, 천사의 인도로 풀려나게 됩니다.

욥기를 보십시오.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욥기 1장 1절). 그런 그에게 이유 없는 환란이 찾아옵니다. 자녀들이 죽습니다. 그의 자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나 어떤 속 시원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고통의 이유, 재난의 이유, 침묵의 이유를 속 시원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심판이나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 품 안에서의 안식이야', 혹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명과 소명을 다 감당했기에 하나님 나라로 초대한 거야'라고 어렴풋이 위로하지만, 고통과 슬픔 속에 남겨진 자들은 그 어떤 이유도 와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분노하고, 하나님께 따지고, 왜 나를 구해주지 않냐 애원하고, 끝내 그럴 힘조차 없어 절망의 침묵 속에 눈을 감습니다. 나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 내 감각 속에 사라집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내 슬픔과 고통만이 선명하게 감각됩니다. 내 안에 믿음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께 그토록 의지하였다면 주님이 나를 구해 주셨을까? 아니! 주님이 진짜 나를 사랑했다면 나는 이미 건져졌어!'

이유를 찾지 못하기에 고통스럽고, 고통은 고통을 계속 낳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아 좌절하고 좌절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들리는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우리 안에서는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으나 하나님께는 반드시 답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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