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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걍 Jun 29. 2020

비 오는 날이면 클래식을 듣던 사람

190906, 북촌 어딘가의 창문.


비 오는 날이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쇼팽, 어떤 날에는 라흐마니노프, 어떤 날에는 모차르트였지요. 나는 빗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지만 그가 튼 음악 소리가 빗소리를 덮게 두었습니다. 함께 음악을 들으면, 그가 느끼는 것을 나도 조금쯤 겪을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타닥거리는 빗소리가 여러 악기의 선율과 섞이자 제가 떠올린 건 와인 한 잔이었습니다. 나는 결국 비 오는 날이면 한 잔의 술을 떠올리는 사람이었던 거지요.


빗소리와 드뷔시의 달빛은 역시 잘 어울린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앞에서 나는 턱을 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게는 클래식이 지루했거든요. 김이 서린 창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부연 걸 지워내는 걸 보는 게 차라리 내게는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닦아낸 창으로 바라본 바깥 마당에 로즈마리 이파리 위로 야트막한 빗소리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풍경을 보자 쌉싸래한 냄새가 맡아질 듯 했습니다. 달빛에서는 씁쓸한 비 냄새가 나는 걸까, 나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달빛은 만져지는 것이 아닌데, 거기에서 씁쓸한 냄새가 난다고 하면 그것은 어딘가 거슬거슬한 촉감으로 만져질 듯했습니다. 그러니까 빗소리를 악기 소리로 덮는 건 어딘가 야생을 길들이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거친 나무토막 위를 사포질 하여 매끄럽게 만드는 느낌, 혹은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위를 보드라운 천으로 덮어 놓는 느낌. 날 것의 인생을 살살 보다듬고 길들여서 결국 삶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행위처럼, 음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져지게끔, 그리하여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되게끔 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사랑했거든요. 알지 못하는 게 많은 세계야말로 재미있는 세계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그는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살았고 그래서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나는 그가 클래식 음악을 들었던 건 그것이 이 세상을 이해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는 걸, 나는 이해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재미 없어졌고, 그래서 나는 그를 떠났습니다. 그날의 날씨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마지막으로 바라본 그의 얼굴에서 언젠가 들은 선율이 떠올랐던 게 기억납니다.


무심코 떠오른 선율은 오래도록 주룩주룩 흘러내렸습니다. 선율은 오래도록 흘렀지만, 내 곁에는 고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정이 그려내던 선율의 이름을 나는 아직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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