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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걍 Jun 26. 2020

여름은 미화하기 좋은 계절

7월의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가는 길의 창밖 풍경.


 아, 덥다.


 하루를 보내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적이 많아졌다. 근래에는 잠을 자다가 뜨거운 이불이 몸에 엉겨붙는 감촉에 빈번히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뜨거운 건 내 몸이었다. 창문을 꼭 닫고 잠들었더니 자는 동안 잔뜩 열이 오른 몸이 더위를 호소하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면 자는 동안 걷어차서 땅에 떨어진 이불을 줍는 일을 몇 번 반복하다가, 어제는 드디어 여름이불을 꺼내 들었다. 침대 시트와 이불을 얇은 것으로 교체하자 자는 동안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없어졌다. 어쩌면 자기 전 조금 열어 둔 창문 덕인지도, 어제 새로 매단 암막커튼 덕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름이구나 싶다. 집 안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무연히 여름이 왔다. 내일이면 6월이네, 오늘부터 6월이네 말했던 것도 같은데 어느덧 보름이 지나버린 6월의 초여름이다.


 여름은 싫다. 겨울이면 이 몸의 체온을 따듯한 것으로 느낄 수 있는데 여름이면 몸에서 들끓는 열을 다 내다 버리고 싶어지고, 그러면 인간의 체온도 부정하고 싶어지고, 도무지 여름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계절인 것이다. 여름은 너무 환하고, 환한 낮 나는 어지럽다. 한낮의 태양이 드러내는 현실의 풍경 속에 내가 속했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방향을 잃고 거기에서 유리되어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작년에는 여름을 조금 어여삐 바라보지 않았었나? 생각하며 무심코 음악 어플을 눌렀다. 플레이리스트를 대충 훑다가 상단에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노래가 눈에 띄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였다. 아, 이 노래 좋지, 생각하며 노래를 틀었다가 피식 웃었다. 노래를 들으니 한낮의 열기가 쓰르르 식은 여름밤이 생각났고, 그게 꽤 좋게 느껴져서 내가 좋아했던 여름은 미화하기 좋은 계절이었단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랬다. 내가 여름을 좋아할 수 있었던 건 잔뜩 짜증이 났던 기억까지도 고작 노래 한 곡, 사진 한 장에 덮어버릴 수 있는 계절이 여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름은 싫어했지만 여름을 미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좋아했다. 이를 테면 그런 것이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웃고 있던 사진 속의 내 얼굴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잔뜩 달아오른 뺨 안으로 터질 것 같이 열기가 차올랐던 감각을, 눈이 부셔서 손으로 만든 차양막 위로 볕이 따갑게 내리꽂히던 감각을,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혼몽해지던 감각을 전부 생생히 기억하는데도 그날의 기억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날의 웃고 있던 얼굴을 떠올리면 빛나게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여름의 무서운 점이었다. 여름은 지난 기억을 모조리 반짝이는 것으로 미화시켜 버렸다.


 또 여름밤은 어떤가. 지독하게 저물지 않던 해가 떨어지고 나면 답답한 더위도 약간은 조임을 풀고 그러면 조금 숨통이 트인다. 여름밤은 어두운데도 따뜻하고, 그것이 어두우면 차가워지는 겨울의 것과 달라서 사람들은 밤에도 우울해지지 않고 살아 있다.


 여름밤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잡은 손 안에 땀이 차오르면 잡았던 손을 털어내며 웃을 수도 있다. 손 안의 땀을 말리며 곁의 사람과 나란히 걷다 보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꿈 같은 느낌이 여름밤에는 있다. 그런 여름밤을 생각하면 나는 나한테 없는 기억도 마치 내 기억인 것처럼 망상할 수가 있다.


 그래서 여름은 참 미워할 수 없는 계절이구나 생각했다. (물론 이 생각은 한여름이 되기도 전에 휘발되어 버릴 것이지만.) 여름에 창문을 열어 두면, 습기 때문인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유독 생생하게 들려오곤 했다. 그런 것들은 살아 있다는 실감을 주고 나 역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냥 살게 됐다. 생각해보면 여름은 죽기에 썩 좋은 계절도 아닌 것 같으니까, 살아서 여름을 견디게 됐다. 그러다보면 잘 읽은 소설 제목(여름을 지나가다)처럼 삶도 여름도 그냥 지나가졌다. 이번 여름 이제 시작되었으니 여름을 기다리는 건 끝났고 지나갈 일만 남았다. 여름을 잘 지나가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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