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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걍 Aug 31. 2020

사소하고 개인적인 커피의 역사

2019년 7월, 서촌의 한 커피숍.


 커피는 어른의 음료라고 생각했었다. 하루에 믹스커피를 몇 잔씩 마시는 엄마를 보면서도 그걸 내가 먹고 싶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다 한 번은 웬 호기심이 도졌는지,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언니와 함께 자판기로 달려가 몰래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내가 '어른들 음료'를 마셔도 될까, 몹쓸 짓을 하는 양 괜히 두근거리는 와중 처음으로 입에 대 본 커피의 맛이 아직도 기억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에 대 본 커피는, 썼다. ‘어때? 어때?’ 언니가 물었던가. 그때가 초등학생일 때였나, 유치원을 다닐 때였나. 자세한 사항들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데 처음 맛 본 믹스커피가 아주 쓰게 느껴졌다는 커피의 첫인상만큼은 선명히 기억이 난다.


 올해 봄에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친구와 함께 카페에 갔다. 그곳은 드립 커피를 주력으로 하는 곳이라 논 카페인 음료가 마땅치 않았는데, 고민하던 친구가 나를 따라 아인슈페너를 시키지 뭔가. 크림이 올라간 커피라는 설명에 시킨 것 같은데, 곧잘 먹는 것 같아 안 쓰냐고 물어보자 ‘써요… 레모네이드 먹을 걸. 이걸 먹느니 일찍 죽지’ 라며……. 심지어 너무 쓴지 입술을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한참을 웃었다. 이런 걸 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쓴 맛을 민감하게 느끼는 건 맞는가 보다. 하기사 나에게도 고등학교 때까지 커피는 쓰기만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친구들과 카페에 갈 일이 종종 생기곤 했지만, 그때도 나는 커피가 아닌 음료를 주로 시키곤 했다.


 그나마 고등학생 때 내가 마시던 커피 메뉴가 있다면 카페모카였다. 카라멜 마끼아또는 그 전에도 마셔봤지만 너무 달아 취향이 아니었는데, 카페모카는 그보다 덜 단 데다가 향이 좋아 아주 맛있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나에게 카페모카는 '초콜릿이 들어간 커피'라기보단 '커피가 들어간 초콜릿 음료'였다. 내가 카페모카를 좋아한 건 달콤한 향이 좋았기 때문인데, 그 향의 상당 부분은 카페모카 안에 들어간 초콜릿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카페모카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해서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다. 이 외에도 고등학생 때 잠이 안 올 때면 따듯한 우유에 믹스커피와 설탕을 타서 마시기도 했지만, 이 달달한 커피우유 역시 커피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말이다.


 그러니 내가 정말 커피에 맛을 들이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라고 봐야 할 듯하다. 그 당시 나는 대입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며 친구와 주말마다 만나 스터디를 했는데, 그러면서 자연히 이전보다 카페를 방문할 일이 많아졌다. 친구와 주로 만났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매번 다양한 음료를 시키는 건 없는 고등학생 용돈에 부담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손이 가기 시작한 게 카페라떼였다. 예전만큼 많이 단 게 좋지는 않았고, 아메리카노는 여전히 사약처럼 느껴졌기에 시켜본 카페라떼가 생각보다 내 입에 잘 맞았다. 고소한 맛이 좋아 카페라떼를 계속 마시다 보니 커피의 향도 좋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나는 비로소 커피를 마시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후 대학에 가서는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가 되면서 특히나 커피에 대해 아는 척을 하게 되었다. 혼자라도 개의치 않고 카페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여기 커피는 진하니 옅니 산미가 어떻니 크레마가 어떻니, 속으로 슬그머니 비교질을 해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아직 뻘쭘한데, 내가 카페를 좋아하는 건 커피라는 음료보다도 보다 복합적인 공간을 누리기 위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까지 나는 커피를 마시는 날보다 마시지 않는 날이 더 많다. 게다가 내게는 (직장인들이 특히 그러듯) 커피를 생명수처럼 수혈하는 버릇도 자리잡지 않았다. 아직까지 나에게 커피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정도의 존재감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중에 커피머신을 집에 들이고 싶다는 소망은 가슴에 꼭 품고 있다. 눈을 뜨자마자 커피 향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삶의 질을 얼마나 높여주는지 경험해본 바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기숙사에 살 시절, 졸업반이었던 룸메이트 언니는 가전기구를 비롯한 전열기구의 반입이 안 된다는 기숙사의 규정을 사뿐히 즈려밟고 방에 캡슐 커피머신을 가지고 입소했다. 덕분에 나는 아침마다 지이잉-하고 커피머신이 작동되는 소리와 방을 채우는 커피 향기로 눈을 뜰 수 있었고 말이다. 게다가 자애로운 룸메이트 언니는 내게도 맘껏 커피를 내려먹게 허락해 주어서, 언니가 먼저 나가고 뒤늦게 내 몫의 커피를 내려 마실 때면 하루가 평화롭게 시작되는 기분에 좁은 방 안에서도 풍요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커피 냄새가 종종 그리워질 때가 있다.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카페도 쉬이 방문할 수 없게 된 시기엔 더더욱 그렇다. 오늘은 특히 커피가 마시고 싶단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이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말은, 친애하는 이들과 함께 카페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만남을 갖고 싶다는 말. 그저 일상이었던 그 풍경을 어렵게 느끼게 되기까지 너무나 짧은 시간이 걸려 야속하다.


 마지막 여담으로 개인적인 커피 취향에 대해 늘어놓고 가야겠다. 나에게는 커피 입문 과정이라고 믿게 되는 단계가 있다. '카라멜 마끼아또 - 카페모카 - (바닐라라떼) - 카페라떼 - 아메리카노' 순서로 사람들이 커피에 입문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아직 안 좋아한다. 얼음이 다 녹아 보리차처럼 밍밍해진 아메리카노가 되어야만 그나마 좋아하는 이상한 취향을 갖고 있다. 아메리카노보다는 드립 커피가 맛있긴 하던데, 그래도 여전히 제일 많이 시키는 건 카페라떼이고 플랫화이트를 파는 곳에서는 꼭 플랫화이트를 시킨다. 플랫화이트를 파는 카페라면 커피 맛이 보통은 간다는 생각이 있어서 새로운 카페 방문에 참고사항으로 삼기도 한다. 원두는 아메리카노에서만 따진다. 라떼는 고소한 맛에 마시지만,  아메리카노는 좋은 원두라면 산미가 조금 있어도 참 좋더라.


 어서 다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커피 맛을 비교할 수 있는 때가 오길… 더 열심히 기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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