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씨, 당신에게...
할머니, 창밖으로 제비가 날아. 제비 대여섯 마리가 유채꽃 위를 현란하게 날아다녀. 나는 저 새가 제비가 맞다는 걸 인터넷에 제비를 검색한 후에야 알았어. 나는 제비는 푸른 날개가 멋들어진 새라고만 생각했는데 실물이 참 귀엽게 생겼네.
할머니에게는 제비가 나에게보다 조금 더 친숙하겠지? 옛날에는 제비가 지금보다 자주 보였을 테니까. 약한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여러 마리의 제비가 하얀 배를 총총거리며 뛰어다니고 있다고, 내가 말하면 할머니는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
내가 이 풍경을 할머니와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면 어쩐지 콱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어. 나, 할머니에게 못되게 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좋은 풍경 앞에 서면 가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까? 내 젊음이 할머니의 젊음을 먹고 자란 건 아닌데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까닭은 무얼까?
나는 종종 당신을 모시고 비행기를 타서… 비행기건 기차건 자동차건 무엇이든 타서 당신을 바다 앞에 데려다 놓는 상상을 하곤 했어. 불가능하진 않을 테지만 얼마간 불가능을 닮아 있다고 여긴 상상. 그러다 알게 된 거야. 할머니는 나의 젊음을 목도하며 살고 있는데 나는 당신의 젊음을 알지 못한다는 걸.
이상하다. 당신이 궁금했던 순간이 분명 있었는데. 표면에 갈라짐이 생긴 흑백사진을 바라보며, 팽팽한 얼굴을 한 그 낯설고 낯익은 계집애의 삶이 궁금해졌던 적이 분명 내게도 있었는데. 몇 년 새 나는 당신에게 무뎌지고 만 거야.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리 없단 가정에 기대어 겨우 솔직해지자면, 나는 당신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만은 없었거든.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는 건 여느 가족의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런 말마저 모질게 느껴질 것 같아서 나는 미운 마음을 당신에게 표출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방 안에서 뾰족해진 마음을 홀로 달래다 보면 차라리 무심을 택하는 게 내가 편한 길이란 걸 알게 되었지. 할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내가 당신께 실망하게 된다면 난 당신을 열심히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점점 예전보다 무심한 손녀가 되어가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 젊음 뿐일까. 나는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을 터야.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하니 머릿속이 깜깜해져셔 할머니한테 할 말이 이렇게 없었나 아연해지더라. 당신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이 결국 내 죄책감의 씨앗이 되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어.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늘 내게 관심이 많았지. 나는 아직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낑낑대는 목소리로 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기던, 당신의 꿈자리를 신의 말씀처럼 전하던 모습이 떠올라. 당신은 본인 몸 상태를 토로할 때보다 나와 언니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건넬 때 목소리가 훨씬 심각하단 것도 모르지? 한 번은 기운이 다 빠진 당신의 목소리를 듣다가 이것이 내가 듣는 할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기도 했어.
그러니까 나는 가끔 당신이 미워도 다시 당신을 사랑하는 평상시로 돌아오고 말아. 할머니를 향한 사랑은 미지근해질지언정 죽지는 않아서, 당신에게 무관심했던 내 모습은 당신을 향한 마음의 빚으로 남고야 말았어. 그래서 나는 두려워졌어. 나는 이러다 내게 평생의 후회가 덜컥 주어질까 두려워.
당신의 노쇠한 모습 앞에서 당신 없는 미래가 두려워질 때면 나는 당신은 충성스러운 신자이시니 반드시 천국에 가실 거라는 믿음으로 위안을 삼곤 했어.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드네. 할머니, 나는 당신께 사후의 천국 말고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천국을 보여드리고 싶어. 이 마을에서는 쉰 살이 넘는 어른도 청년으로 통하거든. 마을에 떡하니 세워진 ‘장수마을’ 현판에 걸맞게 젊은이보다 노인들이 훨씬 많이 보이고, 할머니보다 나이 많은 팽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거든.
그래서 나는 이곳의 할망들이 여전히 밭일을 나가고 스쿠터를 타고 다니듯… 당신의 인생이 아직 끝이 아니란 걸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내가 뭘 할수 있을까는 아직 모르겠어. 일단 당신께 사근사근한 손녀가 되는 것 먼저 해 볼까?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긍정적인 건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을 당신과 함께 보기 전까지는 당신에게 노력을 기울여보잔 마음이 내게 생겨났다는 거야. 나는 수십 번도 넘게 방문한 커피숍에서 매번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데, 창문과 마주한 이웃의 시골집 낮은 돌담 안으로 누군가 유채꽃을 심어 두었어. 흐린 날인데 유채의 노랑은 선명해서 그 위를 노니는 제비 날개의 푸른빛이 유독 눈에 띄어.
이 풍경을 당신과 함께 보러 올 수 있을까? 나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가끔 당신의 이름을 불러볼게. OO씨, 하고 당신을 부르면 어쩌면 당신은 역정을 내실지도 모르지만, 할머니가 이름을 불리지 못하는 게 문득 마음에 걸린 젊은 나의 마음이니까.
집에 돌아가면 이번엔 이름을 불러 볼래. OO씨, 조용히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할머니는 제비를 본 적이 있냐고 물어 볼래. 할머니에게 종종 말을 걸 때, 질문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이름을 불러 볼까.
나는 다시 할머니가 궁금해졌어.
2021년 4월 1일
당신에게 살갑지는 못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손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