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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걍 Sep 04. 2020

곧 은행잎이 물들겠구나

친구 B에게


 B에게...




 안녕 B. 여름의 너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가을을 생각했어. 곧 은행잎이 물들겠구나. 그러고 보니 가을의 너는 본 기억이 없단 생각이 들더라. 그럴 리 없지. 10년을 함께 한 우리인데 가을에 너를 만난 적이 없을 리가. 하지만 하염없이 붉고 노란 단풍 풍경 속에 서 있는 네 모습을 나는 잘 떠올릴 수 없었어. 그래서 너를 생각할 때면 네 옷차림은 늘 얇았고, 햇살은 계절을 알 수 없는 모호함이었나봐.


 그냥, 우리가 보낸 시간들에 대해 생각했어. 다투듯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건 참 오랜만에 쓰는 편지지. 사실 편지에는 언제나 오랜만이라는 말이 붙곤 해. 굳이 편지를 써야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잖니. 우리가 학교를 다녔을 때와는 또 많은 게 변했지. 빠르고 편리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으면서도 굳이 느리고 불편했을 때의 방식을 추억하는 건 왜일까. 그리고 그런 것들에 더욱 애정이 가는 이유는?


 너나 나나 참 예전의 것들을 좋아하곤 하잖니. 그 시절의 노래와 빈티지 원피스. 이미 세상을 떠난 시인들의 시집을 읽고,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카메라를 들고 필름 사진을 찍지. 있잖아. 나는 우리의 취향이 참 다르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사이에 교집합이 많아지고, 네가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다고 느낄 때마다 반가워지고 또 신기해하게 돼. 나는 우리가 서로 달라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결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더라.


 나는 그래서 우리가 자랐다고 생각했어. 예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분명 어딘가 풍성해졌을 거라고. 가끔씩은 스스로가 하염없이 애 같다고 느껴지고, 나는 아직 자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싶었어. 내가 아이이든 어른이든 내 세계에는 네가 있었으니까. 철없이 낭만을 꿈꿀 때에는 너와 동조할 수 있어서 기뻤고, 무언가를 시작하면 몰두하여 잘하게 되는 네가 멋있었을 때에는 내 친구의 성숙함이 자랑스러웠어.


 나는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한 분명한 사랑이 있다면 너였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보다 더 어렸던 그때엔 잘 몰랐지만 우리가 나눴던 건 분명 사랑이었을 거라고. 어떻게든 세상의 좋은 말을 긁어다 전해주려고 아등바등했잖아.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행복을 논하고, 내가 아는 말 중에서 가장 귀한 말을 고르고 골라 몇 백 장의 편지를 주고받았잖아. 우리는 그걸 보물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서로의 존재야말로 보물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지.


 그런데 이상하지. 너를 사랑해서 너와 보낸 시간을 사랑했고, 그래서 때로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는데 나는 도무지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었어. 세상을 알게 될수록 그렇게 됐어.


 그게 슬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조차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서 너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할 수 없었을 때에는 슬펐어. 말의 소용없음을 느끼는 순간은 참 많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말하고 싶었는데……. 차라리 마음을 까뒤집어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은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자신의 생각조차 전부 알지 못하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가 있었겠어. 내가 아는 중에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있는 말은 한마디 뿐이었어.


 사랑해. B야. 나는 너의 우선을 생각해. 내가 나를 우선하기에, 너도 너를 우선했으면 좋겠어서 내가 좋은 게 아니라 네가 좋은 걸 고민하다 보면 꺼낼 있는 말이 없어지곤 했어. 올해 들어 깨닫게 된 건데 나란 인간은 자기본위적이어서 얘기밖에 줄 모르더라. 그래도 나는 앞으로도 네 앞에서 열심히 떠들어 볼까 해.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시간이 채워진다면, 여지껏 그래왔듯 세월이 무심히 흘러간다면 우리는 여전히 함께 미래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너와 단풍 구경을 하고 싶어. 눈이 소복이 쌓인 돌담을 걷고 싶고, 뜨거운 한여름에 바닷물에 온 몸을 담그며 얼굴을 마주 보고 웃고 싶어. 우리가 아직 겪지 못한 많은 경험의 자리를 채워 나갔으면 좋겠어. 이건 모두 나의 욕심이기에 몰래 쓰는 편지에 적는다. 내 순수가 지나가는 시간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준 너에게 감사하며. 네가 맡은 내 안의 가장 특별한 자리는 아직 아무도 넘보지 못했음을 고백하면서.


 조만간 만나.




2020년 9월 3일

너의 가장 친애하는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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