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갱작가 Apr 20. 2021

애매한 역량을 가진 이들에게

어쩌다 스타트업 마케터


 방과 후엔 TV 애니메이션을 시청했다. 교내 그림 그리기 대회에 모두 참가했다. 어릴 적부터 콘텐츠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어서 그런가, TV CF/광고에 눈길이 갔다. 중학생 때 장래희망을 적는 공간에 처음으로 <광고 기획자>를 기입했던 순간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갑작스럽게 신설된 교내 광고동아리에 친구를 이끌고 가입했다. 사실 이름만 광고동아리였지, 축제 포스터 제작한 것만 기억에 남는다. 직업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누군가 물어볼 때면, 나는 항상 광고 기획자를 언급했다. 


광고홍보학과,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신문방송학과, 언론홍보학과..


 뭔 놈의 이름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 대학교 학과를 둘러보는 데 어딜 가야 할지 몰랐다. 결국 유관 분야로 대학을 진학했고,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광고 공모전 입상, 홍보 포스터 외주 제작, 영상 촬영 및 편집, 시나리오 제작, KBS 견학, 방송용 카메라 조작, 팟캐스트 제작, 마을 축제 기획 및 참여, Kobaco 광고교육원 우수 교육생 선정, 뮤지컬 연출 참여···. 모두 말하려니 숨이 가빠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사실, 취준생 시절 가장 컸던 고민이 <그다지 튀지 않는 고만고만한 능력>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 디자인 역량?  ▶ 상 , [중] , 하

관심과 어느 정도 재주는 있지만 디자인 전문 직종에 갈 정도는 아니야.

- 사무직?  ▶ 상 , [중] , 하

팀 프로젝트할 때 PPT를 주로 제작했지만, 문서 능력자는 아니야. 

- 광고 기획자?  ▶ 상 , [중] , 하

기획하는 것 물론 좋긴 한데, 광고를 제작하는 쪽이 더 관심 있는 것 같아.

- 관찰력/분석력?  ▶ 상 , [중] , 하

집중하면 데이터를 도출할 순 있지만, 그렇게 예리하진 않아. 

- 영상 편집 및 제작?  ▶ 상 , [중] , 하

간단한 편집은 할 줄 알지만, 방송국 PD가 될 정도는 아니야.

- 글쓰기 재주?  ▶ 상 , [중] , 하

보고서 쓰는 건 늘 어려운데 그렇다고 못 쓰는 건 아니야.


 막연히 그려왔던 광고 기획자라는 직무에 대해 흔들리는 시점이 찾아왔다. 채용 공고에선 한 가지 분야를 깊게 잘 다룰 줄 아는 지원자를 희망했고, 다방면으로 얕게 경험했던 나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직무에 대해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한 학기 휴학을 하며 머리를 비웠다. 하지만 이내 취업에 대한 슬럼프가 찾아왔고, 더 이상 구직을 미룰 수 없어 직업 종류에 대해 탐색했다. 애초에 전문직종을 선택할 걸, 이과를 갔어야 했나, 기술직이 정답일까 등등 고민을 무진장 많이 했다. 확고한 꿈과 의지가 있는 친구들이 대단하고 부러웠다.


 한편 채용 사이트에서 웹툰 작가 관리직을 구인하는 것이 신기했고, 비영리 분야도 알게 됐다. '에라이, 아무거나 경험해보자' 식으로 포럼 STAFF 알바 체험부터 한국 만화박물관 인턴 공고도 지원해보고, 비영리 아르바이트에도 참여했다. 먼 지역에서 직무 상담도 받아보고, 기업에서 주관하는 일일 직무 콘서트에도 참여했다. 인생은 실전! 더 이상 아르바이트에 만족하지 않고 이름 없는 홍보대행사에서 인턴을 하다가 사회의 쓴맛(?)도 보았다. (← 내 인생 가장 암흑기, 경험담은 언젠가 풀어보겠다)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나라는 깃발이 끊임없이 펄럭였지만 서류 상의 공백기는 조용히 길어져만 갔다. 


 직무에 대해 끊임없이 갈망한 결과일까? 우연한 기회로 디지털 마케팅 직무 교육을 신청했다. 커리큘럼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네이버라는 단어가 보이길래 호기심이 생겼었고, 친숙한 만큼 배우기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단순히 미디어 포스팅하는 것과 광고를 송출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었다. 매체에서 광고를 집행하는 건 매우 고도화된 기술이었고, 광고뿐만 아니라 개인 홈페이지 제작, 광고 성과 분석, 자체 콘텐츠 제작도 두루두루 할 줄 알아야 했다. 하루에도 수 십 개, 무의식적으로 지나친 온라인 광고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마케터라는 직무는 누구나 할 수 없는 전문 직종이라는 부분이 가장 크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현 회사의 대표님이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셨다. "채용 당시, 갱작가님은 본인이 지닌 역량들이 깊지 않다고 걱정해했지만, 오히려 스타트업에는 넓고 다양한 역량을 지닌 마케터가 필요해요." 


 머리가 띵- 했다. 이게 바로 사고의 전환인가? 정말로 마케터로 활동하면서 광고 콘텐츠에 대해 감각이 있어야 했고, 때로는 직접 만들기도 했다. 광고 카피를 맛깔나게 적으면 좋았고, 광고 성과 지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는 눈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다방면으로 무언가 할 수 있었던 나의 그저 그런 역량들이 모여, 스타트업 마케터의 찰떡- 인재상이 되어버렸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결론은 누구든 어떠한 역량을 가지고 있고 무슨 직무에서든 그 역량과 경험이 모여 빛을 내는 순간이 올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애매한 능력을 가졌을 땐 마케터가 정답이다!라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취준생 때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너무나도 불안했고, 누구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출근 전이나 퇴근 후 직무 이야기를 끄적이는 이유 중 하나도, 진로에 대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내 글로 조그마한 물꼬를 트이게 해주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이다. 아마 이건 평생 숙제이지 않을까?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요즘, 다음 직업을 탐구하기 위해 매스컴에 귀를 쫑긋, 세상을 향해 눈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언젠가 내가 디지털 마케터가 되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전혀 새로운 기회의 장이 올 수 있도록!

작가의 이전글 미라클모닝 한 달 후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