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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Oct 23. 2020

호랑이도 여우도 토끼도 없는 이곳에선 내가 왕이다.

2020년 10월 열여드레날의 단어들

지역 행사에서 한 코너를 부탁받았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 동안 한국어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 이야기할 주제도 미리 카드로 만들고 그중의 하나는 부루마블의 황금열쇠처럼 잰말놀이도 하나 넣었다. 이렇게 정성 들여 만들면 뭐하나. 아침에 가방을 바꿔서 갖고 나오느라 고스란히 집에 두고 왔다. 짐은 전날 꾸리자. 금세 잊어버릴 인생 교훈을 또 하나 배웠다.


한국어 회화는 사실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이곳 일본에서 내가 가장 내세울 수 있는 내 장점이 바로 한국어 아니겠는가. 심지어 내가 간장 공장 공장장을 캉창 콩창 콩창창이라고 하더라도 내 한국어를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호랑이도 여우도 토끼도 없는 이곳에선 내가 왕이다. 그것도 세종대왕이다. 그런데 이 대왕님도 어려운 것이 있으니 바로 소극적인 사람들을 대화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한국어 회화는 하나의 질문에 대해 참가자 전원이 돌아가면서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오늘 참가자 중에는 트와이스를 좋아하는 여고생도 있었는데 한국어 실력은 둘째 치고서라도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해도 그 대답을 듣기까지는 하세월이었다. 그렇다면 내 질문이 어려웠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국의 굴기에 따른 팽창정책과 미국의 태평양 정책이 충돌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일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하는가, 코로나와 공존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 작금의 현실을 고려해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영업자 지원 그리고 일회용 쓰레기 문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따위의 질문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한국 드라마나 영화나 음악이나 책은 뭐예요? 한국에 가본 적이 있거나 가보고 싶은 곳은 어디예요? 한국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고치현의 관광지나 음식점은 어디예요? 나는 이 질문들과 함께 '그래 할 수 있어!' 하는 눈빛을 보내주면서 헨젤과 그레텔처럼 대답을 이끌어내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도 같이 던져주었다. 녹록지 않은 한 시간이었다.


슬슬 저녁을 먹을까 하는데 K한테 산책 가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얼마 전에 산 짐벌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강둑에는 우리처럼 한가롭게 걷는 사람, 이 선선한 날씨에 땀을 흘리며 조깅하는 사람, 개와 산책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와 같이 반시계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맞은편에서 시계 방향으로 오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가 앞지른 사람과 그런 우리를 잽싸게 제쳐가는 사람들이 한데 섞였다. 사람들을 피해서 영상을 찍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몽둥이 같은 짐벌을 들고 다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스쳐 지나갔다. 강둑 아래로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폈다. 이 동네에서 네 번의 가을을 보내는 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인데 누군가 열심히 씨를 뿌렸나 보다. 그 덕을 내가 누린다. 강변을 한 바퀴 도니 어느덧 노을도 사위어 강 위로도 푸르스름한 하늘이 깔렸다.


早口言葉(はやくちことば):잰말놀이
ソーシャルディスタンス:소셜 디스턴스, 사회적 거리두기
時計回り(とけいまわり)・反時計回り(はんとけいまわり):시계 방향・반시계 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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