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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01. 2020

비행기에서 내려온 다음에야 자리를 파할 수 있었다.

2020년 10월 스무이튿날의 단어들

어찌나 비가 세차게 내리던지 허공을 때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아니 빗소리에 잠이 깼다기보다 엄청난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어제저녁에 빨래를 하고서는 세탁기 뚜껑을 닫지 않은 것이 잠결에 떠올라 눈이 떠졌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5시 11분. 나는 얼른 침대에서 나와 거실 불을 켠 뒤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향해 유리문을 열었다. 아직은 잠든 사람이 더 많은 새벽이기도 하고 하늘은 온통 비구름으로 덮여 있어 사위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골목길의 가로등과 주변 건물의 보안등만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을 마주하고 있는 맞은편 건물 4층에서 어떤 아저씨 한 명이 계단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얼른 세탁기 뚜껑을 닫은 뒤 거실로 들어갔다. 내가 본 것이 허깨비가 아닌지 다시 문을 열고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아저씨가 우리 집 정면에 있다는 사실, 이렇게 어두운 가운데 거실 불을 켜서 우리 집 위치가 더 도드라졌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도대체 아저씨는 왜 그 시간에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


라인에서 친절하게도 오늘은 I의 생일이니 축하 메시지를 보내보라고 권유했다. 나중에 생일축하 인사나 해야지 하고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사무실에 도착해 조회를 하는데 N이 오늘 I의 생일이라고 얘기했다. 나와 같이 라인의 친절한 안내를 확인한 모양이다. 모두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I의 생일이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점심시간에 T가 작은 컵케이크를 사와서 조촐하지만 다같이 축하해주자고 한다. 지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올라온 I가 양치하러 가는 걸 붙잡고는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촛불 대신 성냥불을 켜줬다. 어떨 때 보면 남자들이 더 훈훈한 것 같기도 하다 라고 하면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걸까. 그냥 T와 N이 좀 더 따뜻한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오사카에서 손님이 와서 통역은 필요없지만 수행을 했다. Ni의 오지랖으로 갑작스레 부보스도 만나게 됐다. 모두들 정장 차림인 가운데 아마도 비서인듯한 직원의 눈길이 누가 봐도 제일 아랫사람인데 저 혼자 재킷을 입지 않은 N에게서 멈춘다. 곧이어 아직도 쿨비즈 차림을 하고 있는 내가 뒤따라 들어가자 '이 놈은 뭐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며 눈길을 떼지 못한다.


부보스는 오사카 손님을 맞이하면서 전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했는데, 사실 둘은 몇 차례고 만난 적이 있다. 다만 그때마다 오사카 손님은 주요 손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보스는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 오사카 손님이 테이블을 내려치면서 일어나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하고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이밀어도 정당방위로 인정될 것 같았다. 부보스는 뒷자리 제일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인사를 해줬다. 이것이 내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부보스를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부보스는 이야기 중간중간에 나랑 같이 출장가서 있었던 이야기도 했는데, 나중에 T가 궁금해했다.


저녁엔 요즘 Ni가 빠져있다는 약선요리 가게에서 오사카 손님을 대접했다. 약선요리라니 이름에서 왠지 진한 풀냄새가 나는 듯했다. 이거 재수 없으면 기껏 저녁 식사자리에 참석하고서도 집에 가서 라면 끓여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의외로 음식은 입에 맞았다. 오늘은 통역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자리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온 것이니 열심히 먹고 마시다 가야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냥 식탁에 고개를 처박고 꾸역꾸역 먹는 것이 아니라 앞자리,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대화에 맞장구도 쳐주고 그 다음 얘기가 궁금해 미칠 것 같다는 눈빛을 보내주면서 밥값을 했다.


Ni는 전에 김종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1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에 갔는데 큐바 사태로 대통령은 못 만나고 그 동생 케네디를 만나게 됐다. 그래서 동생 케네디가 있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책상에 두 다리를 꼬아 올려놓고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김종필은 한 술 더 떠 앞에 있는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한국 수행자가 깜짝 놀라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니 저이도 저러고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무어냐고 했고 그제야 동생 케네디가 미안하다며 다리를 가지런히 하고 김종필을 맞이했단다.


2 한일국교정상화가 되기 전, 김종필이 자민당 유력 정치인인 오노 반보쿠(大野伴睦)를 만나러 그의 집으로 갔다. 마침 오노는 목욕을 하고 나오느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김종필을 맞이하게 되어 당황했는데, '어차피 저도 똑같은 것이 달려있으니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는 김종필의 재치있는 말에 마음을 열었단다.


3 그런 오노 반보쿠가 한 겨울에 방한을 한다. 오노는 김포공항에서 내리면서 마중 나와있던 김종필에게 '역시 간코쿠(寒国 추운 나라라는 뜻, 한국韓国과 발음이 같다)군요'라며 인사했단다.


4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해 논의하고자 김종필과 오히라(大平)가 만났지만 누구도 먼저 얘기하지 않고 3시간을 보냈다. 이에 김종필이 '일본에서는 커피도 안 마십니까'라며 말문을 트면서 회담을 시작하게 됐단다.


Ni는 역시 김종필은 대단한 사람이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그 뒤로도 속은 비고 소리만 요란한 이야기들이 식탁 위를 어지럽게 오고갔다. 요리를 다 먹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나니 방충망 밖의 나무 창살이 꼭 형무소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예정된 시각을 넘겨 Ni가 다른 사람들이 띄워준 비행기에서 내려온 다음에야 자리를 파할 수 있었다.


雨雲(あまぐも):비구름
歯磨き(はみがき):양치
コーヒー:커피, 'コピー'라고 하면 복사를 뜻하는 copy가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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