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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03. 2020

사명감을 갖고 팩스문화 계승에 이바지하였다.

2020년 10월 스무사흘날의 단어들

어느 나라에서는 이미 박물관 유리 너머로 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팩스가 이곳 일본에서는 아직 현역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가 막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한국에서는 어플과 QR코드를 활용했지만,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일번지 도쿄에서는 팩스로 확진자 수를 수합했다. 옛것을 아끼며 전통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수화기 너머로 팩스 번호를 또박또박 부르는 모습에서 마치 사라져가는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힘쓰는 인간문화재의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중학생들에게 국제적인 감각을 길러주기 위한 학교 행사에 나를 비롯한 외국인 네 명이 초대됐다. 학교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직접 사무실로 전화를 줘서 우리들의 이름, 나이, 성별을 팩스로 알려달라고 했다. 전화도 아니고 메일도 아니다. 심지어 이전에 직접 사무실로 찾아와 학교 행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들 명함까지 받아갔다. 하지만 꼭 팩스로 알려달란다. 전화를 받은 K의 전언이 끝나고 우리는 '팩스로?'라고 하고서는 더 이상 말을 아꼈다. 왜냐하면 이네들의 팩스 사랑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K에게 라인으로 이름과 나이와 성별을 알려주고, K는 피씨라인에서 우리가 보낸 라인을 컨트롤 씨한 뒤 워드창을 열어 컨트롤 브이하고 인쇄 버튼을 누른다. 곧이어 우웅 소리를 내며 프린트가 종이를 뱉어내면 K는 그 종이를 갖고 팩스 겸용 복사기로 가서 팩스를 보낸다. 작은 액정에서 전송이 완료됐다는 안내가 뜨고, 복사기 안을 들어갔다나와 따뜻해진 종이를 세절기에 넣고 나서야 K는 자리로 돌아온다. 이렇게 오늘도 일본 사무실의 네 명의 외국인은 일본의 전통을 지킨다는 사명감을 갖고 팩스문화 계승에 이바지하였다. 혹은 2020년 올림픽을 2021년에 열기로 했던 어느 날에 사실 나는 팩스를 보내본 적도 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는데 듣는 사람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내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人間国宝(にんげんこくほう):인간문화재, 일본어로는 '인간국보'
コピペ(コピー・アンド・ペースト):복붙
シュレッダー:세절기, 영어 'shreder'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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