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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04. 2020

그래도 다음에 주문할 때는 오이를 빼달라고 해야겠다.

2020년 10월 스무나흘날의 단어들

강좌 두 번째 날이다. 첫 번째 강의 때는 제일 앞자리만 비어 있어서 속으로 울면서 맨 앞에 앉았는데, 오늘은 어째 뒷자리도 비어있다. 다들 스크린이 잘 안 보였던 걸까. 그 와중에 한국인 참가자들은 모두 뒷자리에 몰려 앉았다. 일본에 온 기간은 저마다 달라도 우리는 역시 한 민족이었다.


강의는 공무원이 맡았는데 직함을 무려 세 개나 겸하고 있었다. 고치현의 공예품에 대해 소개했는데 모두 13가지, 그중 국가에서 인정한 것은 도사와시(일본의 전통 종이)와 도사우치하모노(날붙이) 두 가지다. 도사와시는 일본 3대 와시 중 하나라고 소개했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일본 와시에는 도사와시가 없었다. 대게 강의 마지막에 시간을 할애하는 질의응답 시간에는 빨리 끝나는 것이 피차 좋으니 여간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는데 오늘은 사회자가 '질문이 있으신'까지 말했을 때 손을 번쩍 들었다. 일본의 3대 와시라고 하는 데는 기준이 있느냐 아니면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던 것뿐이냐, 왜 세계무형문화유산에는 포함되지 않았느냐. 강연자는 아주 아픈 질문을 했다는 말로 답변을 시작했다. 3대 와시라는 것이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옛부터 그렇게 불렸다.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록하는 것이 도사와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지만, 등록 당시에 도사와시는 아직 국가 인정을 받는데 절차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오후 한국어 강의가 끝나고 나니 바깥은 벌써 어둑해지고 낮에만 해도 시원하던 바람이 제법 차졌다. DY가 저녁을 먹고 가자고 해서 가는 길에 있는 중국집에 들렀다. 4년 반 동안 출근하고 퇴근하며 매일같이 그 앞을 지나던 가게였지만 식사를 하기는 처음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초로의 아저씨 한 명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대게 혼자 오는 손님이라면 식당 한 켠에 있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앉을 법한데 아저씨는 텔레비전을 등지고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아저씨 뒤쪽 식탁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고 어디 숨어있었는지 보이지 않던 사장님 겸 주방장이 이랏샤이(어서오세요) 인사하며 물을 갖다 주었다. 나는 보통 중국집에 오면 메뉴판에서 무얼 먹을지 고르기보다는 메뉴판에 마파두부덮밥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뒤 고민 없이 주문한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파두부가 없다. 짜장면, 짬뽕까지는 아니더라도 볶음밥 없는 중국집에 간 기분이랄까. 사장님에게 마파두부는 없냐고 물어보니 안 한단다. 세상에 마파두부를 안 하는 중국집도 있구나. 어쩔 수 없이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던지라 면을 피해 스부타 덮밥을 주문했다. 우리말로 하자면 식초로 요리한 돼지고기 덮밥인데 요리가 나오고 보니 영락없는 탕수육이었다. 전에도 분명 먹어본 적이 있지만 이토록 내가 한국에서 먹던 탕수육과 그 빛깔이며 냄새가 비슷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먹기 전부터 입에서 감탄이 새어 나왔고 지체할 것 없이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이전에 허름하기 그지없던 장강의 짜장면이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역시 무림고수가 깊은 산골 스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유유자적 지내듯, 소싯적 근방의 요식업계를 제패했을 주방장들은 모두 영업중이라는 팻말이 없으면 망한 곳으로 착각하기 쉬운 누추한 식당 한 켠에서 여전히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850엔이 아깝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에 주문할 때는 오이를 빼달라고 해야겠다.


料理人(りょうりにん):주방장, 요리사
麻婆豆腐(まーぼーとうふ):마파두부
キュウリ(胡瓜):오이, 대게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로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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