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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04. 2020

수화기 너머에서 날아온 어퍼컷에 여지없이 당해버렸다.

2020년 10월 스무엿새날의 단어들

출근하니 모두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아침부터 꽤나 바빠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거리는 결국 담당자이면서 막내인 N에게 깔때기를 꽂아 놓은 것처럼 집중되었다. 한 가지 더 안타까운 것은 과장이 N에게 일을 맡겨두고서도 그 입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장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함께 일하기에는, 특히 윗사람으로 모시기에는 힘든 스타일이다. 그 입! 입! 입! 그 입만 잠시 쉬어준다면 N의 능률이 조금은 더 올라갈 텐데.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사실은 N의 자리에 있는 전화기가 우리 과의 대표 전화라는 것이다. N은 링 위에서 챔피언을 마주해 적절히 펀치를 주고받으며 관중석에서 날아온 과장의 잽도 잘 막아냈지만, 결국 수화기 너머에서 날아온 어퍼컷에 여지없이 당해버리고 말았다.


보통 일본의 인사이동은 4월 1일 이루어지는데 우리 과에서는 예정에 없는 인사이동으로 불과 10일 전에 Y가 새로 오게 됐다. 그리고 N은 Y를 찾는 전화를 받고서는 우리 과에 그런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다. 응? 나와 M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N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지만 N은 머리와 고개 사이에 수화기를 꽂은 채 두 눈은 모니터에 두고 두 손을 키보드 위에서 열심히 놀리느라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도 그럴 리가 없다며 계속해서 Y를 찾는 모양이었고 N은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이윽고 N의 옆자리인 T가 지우개 달린 연필을 N의 눈 앞에서 돌려 시선을 끈 뒤 조심스레 Y쪽을 가리키자 N은 그제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죄송하다며 Y에게 전화를 돌렸다. Y는 차마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거북이가 등껍질에서 고개만 쏙 내민 모양을 하고서는 아무 말 없이 지긋이 N을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무서웠다.


전화를 돌린 뒤 N은 머리가 잠시 이상해졌다는 말을 반복하며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모두들 하하하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어찌 아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상황은 더 무거워졌다. 오히려 진지한 표정과 낮은 목소리로 잠깐 쉬어도 된다고 하니, 이거 이대로 두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든지 웃옷을 뒤집어 까고 할복이라도 하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저녁엔 R, K, M과 함께 식사를 했다.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데 마침 백화점에서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먹거리를 팔고 있단다. 나는 K에게 고향의 맛이 그립지 않냐고 물었고, K는 고향의 맛이 너무 비싸다며 인도 정통 카레나 먹자고 했다. 나는 880엔짜리 치킨카레를 주문한 뒤 난을 무료로 한 장 더 추가해서 먹었다. 

할로윈 분장을 한 고치성(高知城)


頭(あたま)おかしくなった:머리가 이상해졌다
土下座(どげざ):무릎 꿇고 머리 숙이는 일본의 사죄 방식
切腹(せっぷく)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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