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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07. 2020

앞으로 남은 시간을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해야겠다.

2020년 10월 스무아흐레날의 단어들

남들은 모르지만 오테피아 고치도서관 곳곳에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 흔적이 남아있다. 먼저 도서관에 있는 한국어 안내와 팸플릿들은 모두 내 손을 거쳐간 것들이다. 그래서 한국어 안내 앞을 지나갈 때면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진 글자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만 같아 괜히 시선을 피하곤 한다. 한국어 도서 서가는 거짓말 듬뿍 보태서 그 절반을 내가 고른 책들이 채우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내가 굳이 고르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주문한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 소설들이 차지하고 있다. 영어랑 중국어 책들은 그 언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사서가 있어 도서관에 새로 들일 책을 고르는데 문제가 없지만, 한국어는 그러지 못해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GB의 도움을 받아 영어와 중국어에 뒤지지 않도록 서가를 채우고 있다. 다음으로 신문 코너에 가면 일본 국내 신문들과 함께 해외 신문도 놓여 있는데, 한국 신문을 대표해서는 경향신문이 떡하니 한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한국의 유명 보수 언론사 신문이 있었지만 도서관에 아주 자-알 설명해서 경향신문으로 바꿔놓았다. 또 한 가지. 부산광역시에서 매달 일본어로 된 홍보지를 보내주는데, 그동안 마땅히 활용할 곳을 찾지 못했던 것을 도서관에 비치해서 시민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그간의 활동들은 도서관에 갈 일이 있을 때면 괜스레 나의 발길을 붙잡곤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작은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도 내 욕심은 끝이 없어서 도서관에서 한 군데 손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 있다. 고치현과 고치시의 해외 교류지역을 소개하는 코너인데, 마침 도서관으로 인사이동한 Y가 물꼬를 터줘서 제대로 꾸밀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동안 갖고 있던 관광책자들과 한국에 부탁해서 받은 고려청자 향로를 기증했고, Y는 누가 봐도 값 꽤나 나가게 생긴 향로를 그냥 전시했다가 혹시 깨지기라도 할까봐 로 케이스를 제작 주문했다. 서가 위치도 다른 국가들을 밀어내고 성인 평균 눈높이에 딱 맞는, 아파트에 비유하자면 로열층에 자리 잡았다. 이제 향로는 로열층 서가에서 고고한 빛을 띠며 안녕하세요!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일만 남았는데, 전시를 하려면 서가 높낮이를 조정해야 해서 한 달 뒤인 다음 휴관일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나는 그 철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과연 일본 사람들과 내가 공유하는 시간이 그 성질을 달리하는 것은 아닌지 잠시 의심을 품었다. 향로를 보내준 데 대한 감사 편지를 보내면서 실제 전시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M에게 잠깐, 정말 잠깐만 서가에 두고 사진만 찍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부탁하는 내 입장에서는 단순한 것 같았는데 M은 잠시 고민한 다음에야 그러자고 했다. 이로써 도서관에 나의 흔적이 하나 더 남게 됐다.


올해 쓰고 있는 책상달력에는 2021년도 달력이 없어서 조금 불편하다. 그렇다고 곧 한국에 돌아가는데 멀쩡한 달력 하나를 쓰는 것은 아까워서 내 임기를 마치는 달까지만 달력을 인쇄해서 지금 갖고 있는 달력에 붙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H는 머리 좋다고 했다. 내친김에 마지막에 연가를 몰아 쓴다면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임기 마지막 날부터 연가 숫자를 거꾸로 채워봤다. 연가를 모두 채우고 보니 고치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실감됐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저녁엔 U를 만나 한국 요리를 먹었다. 함께한 시간이 조금은 지루했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을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해야겠다.


ハングル:한글
本棚(ほんだな):서가, 책장
カレンダー: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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