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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Nov 26. 2020

하마터면 어느 책 제목처럼 열심히 살 뻔하지 않았나!

2020년 11월 이렛날의 단어들

오전까지는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하늘이 잠잠하다. 이대로 비가 그칠지도 모르는데 자전거 타고 나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차를 타기로 했다. 십 분을 달려 전차가 정류장에 멈춰 서니, 비가 흩뿌리 듯이 내리기 시작한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이제부터 제법 본격적으로 올 것 같다. 자전거를 두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강의실로 향했다.


첫 수업은 무로토 세계지질공원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진행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본인은 마스크를 쓰면 말하기 답답해서 그러는데 마스크를 벗어도 되겠냐고 물어본다. 그렇게 물어보면 누가 안 된다고 하겠냐고 되묻고 싶었다. 누구 하나 그러시라고 한 사람은 없지만 우리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인 직원은 마스크를 벗고(물론 페이스 실드도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수업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만 정리해보자.

1. 무로토 - 해안단구 / 태풍이 자주 지나가는 길목(台風銀座, 태풍 긴자라고 불린다)

2. 무로토의 기라가와마을(吉良川町)에는 오사카 방면에 빗초탄(備長炭, 비장탄)이라는 숯을 팔아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기와집이 남아있다.

3. 빗초탄을 배에 싣고 오사카로 갔던 배가 무로토로 돌아올 때, 배를 무겁게 하기 위해 빨간 벽돌을 실어 왔다. 이때 실어온 벽돌로 집을 짓기도 했는데, 전통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흰 건물 사이에서 눈에 띈다.

4. 태풍이 자주 오는 만큼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지붕 높이를 맞춰서 집을 지었다.

5. 일본 기와는 한국 기와와 달리 물결 모양을 하면서 수키와와 암키와가 같이 있다. 수키와 기능을 하며 옆의 기와를 누르는 부분이 오른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무로토에서는 태풍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모양이 반대인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기라가와마을 사람들은 일본에서 유일하다고 하지만, 사실 다른 지역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6. 세차게 내리는 비에 벽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벽에도 처마(水切り瓦)를 냈다. 이 처마에 기와를 올리기 때문에 돈이 많은 집일수록 처마 층수가 많다.


무로토의 자연환경에 사람들이 적응하면서 독특한 생활모습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수업은 재밌었다. 게다가 직원은 자기가 준비한 자료를 다 설명하고도 20분이 남자 어떻게든 그 시간을 때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대로 수업을 일찍 끝내자고 했다. 다짜고짜 마스크 벗은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 오늘 수업 평가는 별점 5점 드리리다.


오후에는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의 학예관이 수업을 진행했다. 내용은 둘째치고 말하는 속도며 톤이 축축 처져서 졸음이 쏟아졌다. 어떻게든 잠을 깨보려고 하려는데 가운데 분단 맨 앞자리에 앉은 T가 부처님처럼 온화한 얼굴로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뒤를 둘러보니 몇몇이 같은 표정,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역시 나만 졸린 것이 아니었다. 이거 하마터면 어느 책 제목처럼 열심히 살 뻔하지 않았나! 대놓고 자는 것이 아니라 졸음을 이기지 못해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세로 고쳐 잡은 뒤 수마에 저항하지 않고 나를 맡겼다.

대형버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電停(でんてい):전차 정류장
炭(すみ):숯
仏様(ほとけさま)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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