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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Oct 12. 2020

내 하루 업무는 도장을 찍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2020년 10월 아흐레날의 단어들

일본에 오기 전에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지 여러 블로그를 참고하면서 알아봤다. 그중 심심찮게 나오는 것이 바로 도장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만들어준 옥색 도장이 하나 있는데, 혹여라도 이 도장을 가져갔다가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일본에 가져갈 도장을 새로 팠다. 도장과 열쇠를 같이 하는 어두컴컴한 가게를 들어가니 곱슬파마를 한 머리를 어깨 아래까지 늘어뜨린 아주머니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백발이 성성하고 어깨가 살짝 굽은 장인 할아버지가 조각칼로 도장 파던 것을 멈추고 콧등에서 흘러내린 알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추겨올리며 힐끔 쳐다보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전혀 달랐다. 나는 내 이름 한자를 얘기했고(종이에 적어줬나?) 아주머니는 컴퓨터 화면에서 한자를 하나하나 찾아 입력했다. 이어 기계가 움직이면서 도장 바닥에 내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작업이 끝나고 아주머니는 이름이 새겨진 부분을 후 불고 천으로 가루를 닦아낸 뒤 검정색 투박한 도장을 건네줬다.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계산한 뒤 가게를 나섰다. 이렇게 일본 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리스트에서 하나를 해결했다.


만 원을 주고 판 도장은 시청에서 각종 서류작업을 처리하거나 유초은행에서 통장을 만들 때 요긴하게 사용했다. 유초은행에서는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도장을 만지작거리다가 뚜껑이 안 빠져서 혼자서 끙끙대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유별나게 도장을 사용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나는 전국 체인 잡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모든 직원은 당일 근무시간표를 확인하면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런데 벽에 붙은 근무시간표 주변에 인주가 없었다. 인주도 따로 들고다녀야 하나? 싶었는데 얼마 안 가 답을 찾았다. 모두들 잉크가 들어간 도장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대일밴드라고 부르는 반창고가 사실은 회사이름인 것처럼, 잉크 일체형 도장은 따로 이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샤치하타라는 회사가 유명해서 통상 샤치하타라고 불렀다. 집 근처에서 도장 가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서처럼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주는 것을 생각하며 샤치하타를 사러 왔다고 했다. 진열대 넘어 40대 쯤으로 보였던 사장님(사실은 사장님이 아닐지도 모르지만)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주문해서 받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주문? 게다가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기억이 가물가물한데 3-4천 엔을 줬던 것 같다.) 나는 잉크랑 일체형인 도장을 만들 때까지 근무시간표에 사인을 하는 걸로 대신했다. 물론 사인이라고 해서 펜을 상하좌우 휘드르는 것이 아니라 원래 도장을 찍을 만한 작은 공간에 내 성을 한자로 또박또박 적어넣는 것이었다.


이윽고 주문했던 도장을 받았다. 내 이름 석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도장을 살짝 누르면 딸깍 소리를 내면서 안쪽에 숨어 있는 이름 새겨진 면이 내려와 내 이름 석자를 빨갛게 그려넣고 다시 올라갔다. 나는 이 샤치하타 도장을 잡화점에 출근해서 내 근무시간표를 확인할 때마다 사용했다. 내 하루 업무는 도장을 찍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내가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잡화점을 그만 두게 되었을 때, 내가 일본어를 몰라서 접객에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구세주처럼 도와줬던 H가 송별 선물로 새로운 샤치하타를 만들어줬다. 작은 뽁뽁이 안에는 샤치하타와 함께 손편지가 들어있었다.


日本でお仕事するとはんこは必需品です。仕事のお供にして頂ければ幸いです。GOOD LUCK★★   
일본에서 일 할 때 도장은 필수품이에요. 일 할 때 사용해주면 고맙겠어요. GOOD LUCK★★  


나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근무시간표에 찍힌 내 도장을 못 봤을리가 없는데? 하면서 딸깍하고 도장을 눌러 내 이름이 새겨진 면을 꺼내보았다. 거기엔 그동안 내가 근무시간표를 볼 때마다 느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감, 그리고 다른 일본인 직원들은 금세 눈치 챘을지 모를 차이점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내 이름 석자가 아니라 내 성 한 글자만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선물도 고마웠지만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일본 문화까지 고려한 그녀의 센스와 배려가 더 고마웠다.


지금 일하는 곳에서도 심심찮게 도장을 사용한다. 매일 아침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과 내에서 회람을 돌릴 때도 확인했다는 의미로 도장을 찍는다. 서무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문구용품 배달이 오면 물건을 받은 다음에 도장을 찍어준다. 심지어 우산 손잡이에 도장을 찍은 종이를 붙여 우산을 구분하기도 한다. 빨간 인주가 묻어나는 도장과 사인의 책임감이 서로 다르지는 않겠지만, 여기 일본에서 적어도 나는 도장을 찍을 일이 있으면 좀 더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일본에서 총리가 바뀌고 고노 다로 전 방위대신이 행정개혁담당대신이 되면서 조직 내 도장 문화를 개혁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도장 가게들과 일명 도장 의원연맹(일본의 인장제도와 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에서는 반발하고 나섰는데, '탈도장(한코)에 반항(한코-)' 한다며 서명을 모으겠다고 한다. 이 뉴스를 본 순간 (그들의 우국충정이야 역사적 사실 관계는 별도로 하고) 조선말기 개화에 반대하며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자리 잡았다는 최익현이나 상소문을 적어 올렸던 어느 지역 유생들의 짙은 향기가 내 코 끝을 스쳐 지나갔다.


도장 : はんこ
유초은행 : ゆうちょ / 우리나라의 우체국은행에 해당한다.
반항 : 反抗(はんこう)
매거진의 이전글 틀림없다. 여긴 분명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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