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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Oct 16. 2020

혼천의를 이야기한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밝았다.

2020년 10월 열흘날의 단어들

이번주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오늘, 8시가 되기 전에 절로 눈이 떠졌다. 예전에는 주말 아침 일찍 눈이 떠지면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마냥 쉬는 날인데도 왜 늦잠을 못자니 하고 우짖고 싶은 심정이기도 했다. 지금은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는 아니지만) 오히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잡힌 듯하여 뿌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종종 실수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눈을 떴다'는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이불 속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아침도 거르고 오전을 보내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오전은 양반이고 그런 시간이 오후까지 이어지면 나는 그 날 하루 엄청난 자책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1눈을 뜬다 2아침 식사를 한다 3씻는다 이 세가지를 클리어해야만 비로소 '아침 일찍 일어났다(적어도 늦잠은 자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내 스스로 나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칭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아주 훌륭한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4가지였다. 증명사진 인화, 이온에서 장보기, 치과 치료, K 집에서 훠궈식사.


먼저 집 근처 사진관에 갔다. 니시무라 사진관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일 주인 할아버지는 잠시 자리를 비워서 아들이 대신 나를 맞았다. 아들에게 세로 3.5, 가로 3 증명사진 2장을 주문하고 사진을 인화하는 동안 이온에 다녀왔다. 이온에는 해외 식재료를 파는 곳이 있는데 기생충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다고 할까 이제사 이 시골 동네에 유행이 밀려왔다고 할까,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통로쪽에 너구리와 짜파구리를 한가득 쌓아놓고 있었다. 나는 무얼 살지 망설이지 않고 한국에선 일주일에 몇 번이고 먹던 떡볶이 재료들만 골라담아 계산했다. 이온을 나와 다시 사진관에 들러 주문했던 증명사진을 찾아 집에 돌아왔다.


치과 예약 때까지 시간이 남아 선풍기를 청소했다. 부엌에 꺼내놓고 썼던 선풍기는 기름때가 낀 것인지 먼지가 수북해서 제법 시간이 걸렸다. 청소를 마치고 선풍기를 벽장에 넣고 보니 치과 시간이 다 돼서 집을 나섰다. 오늘도 기본 15분은 기다려야 내 차례가 올 줄 알았는데 치과에 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 바로 치과 침대로 안내해줬다. 나는 오늘 치료가 끝날 줄 알고 오늘이 마지막인가요 하고 물었는데 선생님이 아직 멀었단다. 그러면서도 내 뒤에 기다리는 손님이 없어 오늘 아주 치료를 끝장 내주길 내심 기대했지만 선생님은 딱 오늘치만 치료하고 다음에 보자고 했다. 집에 돌아와 방에 두고 썼던 선풍기를 마저 청소했다.


저녁엔 K 집에서 훠궈를 먹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맵찔이에 속했던 나도 일본에 와서는 어깨에 힘 좀 주고 전-혀 안 맵다고 하고 하는데, K는 원래 맵찔이였던 나보다 한 수 위다. 나는 오랜만에 먹는 훠궈가 먹기 좋게 매웠는데 K는 아무 맛이 안 난다며 양념을 더 넣으려고 했다. 다행히 M이 더 넣으면 못 먹을 것 같다고 해서 신라면 스프를 절반 더 넣는 걸로 타협을 봤다.


식사를 마치고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 중국, 미국, 호주 사람들로 작은 비정상회담이 열렸다. 아니 썰전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까. 내가 전날 한글날을 소개하면서 만원권을 보여줬던 것이 계기가 되어 만원권 뒷면에 그려진 혼천의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혼천의는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건 그런데 조선을 기준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는 이야기, 누가 먼저 만든 것이 왜 중요하냐는 이야기, 도대체 지금 무슨 이야기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이야기. 한창 떠들고 한바탕 웃기를 반복했다. K 집에서 나와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혼천의를 이야기한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밝았다.


火鍋(ひなべ): 훠궈
夜空(よぞら): 밤하늘
星(ほし):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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