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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Oct 19. 2020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결혼은 골이 아니라 스타트입니다.

2020년 10월 열사흘의 단어들

우리 과가 원래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는 곳은 아니지만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간간히 하던 회식도 못 하게 되었다. 보통 4월에 신년도가 시작되면서 하던 환영회도 6월 중순이 되어서야 하게 되었고, 그나마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회식이었다. 그리고 오늘, 일본에서 결혼을 하게 된 E를 축하하고자 E와 함께 일하고 있고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모였다. 일본인 직원이었으면 '지난주에 혼인신고 했습니다.'하고 보고하는 걸로 끝났겠지만, E는 외국인 직원이기 때문에 특별히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 늦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늦는다는 연락은커녕 오고 있냐는 메시지에도 답장이 없어 15분을 마냥 기다리다가 결국 주인공 없이 회식을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은 1시간 연가를 쓰고 집에 일찍 돌아가기까지 했던터라 늦을리가 없는데 싶었는데 K는 혹시 기모노를 입고 오느라 늦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그동안 내가 봐왔던 E를 생각했을 때 꽤나 그럴싸한 가설을 제시했다. 나는 한 술 더떠 그냥 기모노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전통 혼례를 할 때 입는 새하얀 기모노에 화장까지 하고 오는 게 아니냐고 했고 K는 짖궂다며 혼냈다. 주인공 없이 회식을 시작하기 위해 마실 것을 주문하고나니 E와 남편이 도착했다. 다행히 기모노는 아니었고 혼인신고서를 내러 가는 날 입으려고 특별히 산 옷을 입고 왔다.


원체 사람 많은 자리를 싫어하는 나는 회식 자리에서도 구석자리를 잡곤 하는데, 오늘도 회식 장소에 일찌감치 도착해서는 작은 테이블 쪽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적당히 출출하기도 해서 요리는 제법 맛있었다. 게다가 고치에서 어느 가게를 가나 나오는 가쓰오 다타키(가다랑어를 겉만 살짝 구운 회 요리)가 도톰해서, 적어도 이 가게가 그저그런 싸구려 가게는 아니구나 하고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니 오늘 회식 자리를 준비한 N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먼저 두 명씩 팀을 짜서 도전 골든벨 형식으로 퀴즈쇼를 진행했다. 첫번째 문제는 E와 남편의 이름을 풀네임으로 쓰는 것이었다.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문제였다. E의 이름은 길면서도 발음하기 어려워서 본인 스스로도 자기소개를 할 때면 이름을 쏼라쏼라 이야기하고는 이름과 전혀 관계 없는 닉네임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게다가 서로 성으로 부르는 일본 문화에서 상대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결국 첫번째 문제에서부터 오답자가 속출했다. 두번째 문제는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날을 묻는 것이었다. 이건 다행히 내 피같은 대휴를 써서 직접 축하하러 갔기 때문에 정답을 맞혔다. 마지막 문제는 E가 가장 기뻐했던 선물은 무엇인가 하는 객관식이었다. 1번 명품백, 2번 남편의 칭찬, 3번 남편의 ??(기억은 안 나는데 으.. 닭살.. 하는 것이었다) 퀴즈쇼 분위기를 띄운 것은 과장과 과장대리 콤비였다. 미리 문제를 알아 답변을 준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정답을 얘기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재치있는 오답을 말해 좌중을 웃기는 역할을 맡았다. 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최수종과 하희라(물론 일본의 대표적인 잉꼬부부를 얘기했다), 오늘부터 1일, 당신의 사랑이었다.


그 다음은 남편에게 안대를 씌운 뒤 각 팀에서 한 명씩 나와 악수를 해서 E의 손을 맞히는 게임이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M과 제법 풍채가 있는 과장의 투박한 손은 일찌감치 정답에서 제외됐다. 모두들 비슷한 또래인 E와 K의 손이 박빙을 이루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남편은 내 손을 다시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는 어머니뻘인 Y의 손을 정답이라고 외쳤다. 이 게임 계속 진행해도 되냐는 농담조 얘기가 나왔고 Y는 손 크기가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며 웃어넘겼는데, 과연 이 말 한 마디에 나는 어색할 수 있는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Y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게임 우승자에게 주는 어마어마한 상품은 두 부부와 악수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이용권이었다. N은 양도 및 판매는 안 된다는 우스갯 소리도 덧붙였다.


샤미센 연주자인 남편이 E와 함께 샤미센 한 곡조를 선보이고 모임이 끝났다. 갑작스럽게 인사이동을 하게 된 과장대리가 송별인사를 겸해 마무리 인사를 했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결혼은 골이 아니라 스타트입니다.' 오 과연 그럴싸한 말이구나 생각하는데 옆에 앉은 과장이 '그럼 나는 스타트도 하지 못했다는 거냐'며 자폭 개그를 선보였고 과장대리는 과장 머리를 살짝 때렸다. 한국에서는 어깨 위로 손을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종종 머리를 때리기도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 놀라웠다. 과장대리는 이제 곧 인사이동 한다며 한 마디 덧붙였고 모두 한바탕 웃은 뒤 자리를 파했다.


入籍(にゅうせき): 혼인신고
婚姻届け(こんいんとどけ): 혼인신고서 / 婚姻届けを出す : 혼인신고서를 하다
上の名前(うねのなまえ): 성(성명을 세로로 쓸 때 성이 위에 오기 때문에)
下の名前(したのなまえ): 이름(성명을 세로로 쓸 때 이름이 아래에 오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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