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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Oct 20. 2020

다리 아래로 잔잔히 흐르는 시만토강이 아찔했다.

2020년 10월 열나흘의 단어들

으레 여행이라면 설레고 들떠야 하겠지만 이번엔 다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는 동안에도 어찌나 심장이 쿵쾅거리던지 그 동안 자신을 의식하지 않았던 나한테 나 여깄소! 하고 말이라도 거는 것만 같았다. 이번 여행을 결정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긴장감은 서서히 고조되었는데 그 이유는 3가지다. 첫번째는 내가 운전대를 잡는다는 사실, 두번째는 10월도 어느덧 중반에 이르러 강물이 얼마나 차가울지 종잡을 수 없다는 불확실함, 그리고 세번째는 예전에 패닉을 겪었던 스쿠버 다이빙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염려였다. 나는 무리해가면서 여행 일정을 잡으려고 했으면서도 막상 여행이 결정된 뒤에는 모종의 이유로 취소되더라도 아쉬움은 없겠다는 비겁한 생각까지 했다.


언제나 부지런한 K가 오늘은 웬일로 늦는 바람에 혼자서 먼저 전차를 타고 렌터카를 빌리러 갔다. 내가 걱정하는 세 가지는 모두 내가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나는 K가 같이 전차를 탔으면 가는 동안에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주유소에 도착해 렌터카 수령 절차를 밟는 동안 E가 남편 차를 타고 도착했고 뒤이어 K가 주유소 안으로 들어섰다. 렌터카를 받은 뒤 큰 길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차선과 전차 선로를 건너 반대쪽 차선으로 들어가야 했다.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 핸들을 잡으면서 E의 남편에게 차 좀 봐달라고 했고, 다행히 신호가 바뀌면서 차들이 뜸해졌을 때 잽싸게 반대쪽 차선으로 차를 몰았다. 이게 뭐 대단한거라고 E와 K는 잘했다며 박수를 쳤다. E의 남편은 장롱면허인데다가 일 년 하고도 반 년만에 운전대를 잡는 내가 조금은 더 수월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좁고 복잡한 길을 피해 시내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줬다.


고치현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고치 시내를 빠져나가면 한적한 시골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왕초보인 나라도 운전이 그리 어렵거나 무섭지 않다. 두 시간을 무사히 달려 시만토시에 도착했다. 다음주면 귀국하는 S가 송별회를 하고 있는 호텔에서 A와 점심을 먹었다. E와 K가 A와 이야기하는 것을 따분해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둘은 A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A는 어린 시절 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어른이 된 뒤에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주고 싶어 왕복 네 시간을 들여 제과제빵 교실을 다녔다. 지금이야 요리하는 남자가 어디 어색하겠느냐만 그 옛날에 중년 남자 혼자서 여자들로 가득한 제과제빵 교실에서 고군부투했을 모습을 상상하면, 그 마음씨는 물론이고 실천력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여든을 훌쩍 넘긴 A가 내가 귀국한 뒤로도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송별회를 마친 S를 태우고 출발하려는데 A가 급히 달려와 차를 세운다. 우리가 온다고 배 타르트를 3개나 만들어왔다. 하나만 받아도 넷이 충분히 나눠먹을 만한 것을,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수에 맞춰 만든 것이다. 우리는 감사 인사를 하고 SUP를 하러 출발했다. 시만토강에는 진카바시(沈下橋)라는 잠수교가 있다. 여름철 강물이 불어나 다리가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난간을 없애고 낮게 만든 다리인데, 고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치를 상징하는 것 중에 하나다. 그동안 이 다리를 걸어서나 건너봤지 차로 건너는 것은 처음이라, 다리 아래로 잔잔히 흐르는 시만토강이 아찔했다.


옷을 갈아입고 강가로 걸어가는 사이 사장님이 작은 트럭에 패들보드를 싣고 뒤따라 왔다. 트럭에서 패들보드 4개를 내려 강가에 절반, 강물에 절반을 걸쳐두었다. 각자 하나씩 고르라고 해서 나는 선택권을 양보하고 남은 것을 탔다. 패들보드를 강물에 띄운 뒤 올라타 먼저 무릎 꿇고 노 젓는 것을 연습했다. 패들보드 위에서 중심을 잡거나 노를 젓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우리가 별 어려움 없이 성공하는 것을 보고 사장님은 곧바로 서서 타는 것을 가르쳐줬는데, 패들보드를 딛고 일어서자 두 다리가 사정 없이 부들거리면서 패들보드도 좌우로 요동쳤다. 여차하면 강물로 빠질 것 같아 다리에 힘을 줄 수록 내 다리도, 패들보드도 더 힘차게 흔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는 요령이 생겨 패들보드 위에 서서 신나게 노를 저으면서 강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고, 나중에는 강 한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는 야카타부네(屋形船, 지붕이 딸린 나무배)의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까지 생겼다.


SUP를 마치고 편의점에 들러 저녁 간식을 산 뒤 미하라촌의 숙소로 향했다.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인데 주인 아주머니는 웃음이 많아 항상 볼 때마다 호호호 웃고 있었고, 주인 아저씨도 눈으로 연신 웃고 있었다. 오늘은 부부의 지인인듯한 사람들이 놀러와서 바베큐를 주문했기 때문에 우리도 엉겁결에 바베큐를 먹게 됐다. 옆 테이블에서는 우리가 몇 마디 중국어를 주고 받는 것을 듣고는 곧바로 어디서 왔냐며 말을 걸어왔다. 남편은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이 지금껏 보고들은 한국, 중국, 싱가포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설령 그것이 자극적인 이야기일지라도 악의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묘한 것은 바로 부인이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처음에는 듣기 좋았지만 부인의 이야기는 은근히 귀에 거슬렸다. 분명히 칭찬을 해주는데도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말 속에 구렁이 300마리가 기어다니는 것만 같았다.


E가 보드 게임을 챙겨왔지만 K가 영 게임 규칙을 이해하지 못해 흥이 오르지 않아 게임은 그만 두고 별을 보러 나갔다. 우리가 걸어내려왔던 계단의 등이 꺼지자 세상은 원래 빛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암흑천지가 됐다. 그 와중에 고개를 살짝 들어 산 너머를 올려다보면 산등성이 뒤로 별들이 점점이 빛나고 있었는데, 이 정적인 광경을 나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못지 않게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3분도 지나지 않아 다들 춥다며 집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 암흑천지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무서워 쫄래쫄래 따라 들어갔다.


SUP : 「with RIVER 四万十」

https://www.withriver.info/


ガソリンスタンド :주유소
ペーパー免許(めんきょ):장롱면허
盛り上がる(もりあがる):흥이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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