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둘 다 늦을 것 같았고(진짜로 SH는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사실 내가 약간 늦더라도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느라 내가 늦은 줄도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지하철이 전역을 출발했다는 화면을 보자 나도 모르게 경주마처럼뛰기 시작했다. 두 발목을 놀려 에스컬레이터보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고, 앞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면서 승강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몸에 열을 내며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기다리게 되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우산을 접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손님은 두 테이블 정도 있어 한산했다.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속으로 잘 됐다 싶었는데, 곧이어 안내해준 2층으로 올라가니 마침 한 테이블만 비어있고 다른 곳은 먼저 온 손님들로 가득하다. 우리 옆 테이블은 젊은 남녀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HR의 촉에 따르면 소개팅 자리고 두 사람 다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라고했다. 과연 듣고 보니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밥값은 더치페이했기를.
식사를 마치고 카페를 갈까 하다가 조금 걸어 어린이대공원에 갔다.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더라. 친구들이랑 한 밤에 대공원에 가려다가 조류독감 때문에 입장을 제한한다고 해서 그 앞에서 돌아왔던 기억이 있는데, 그것도 한참 전의 일이다. 코로나 때문인지 보슬비 때문인지 공원은 한산했다. 서울의 인프라를 이 정도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에 들어서 얼마 걷지 않아 나는 이 어린이대공원이 어린이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분명 예전에도 보았을 테지만 그냥 지나쳤을 동요비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입구에서부터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들이 있었다. 게다가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이라고, 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썼을 문구가 새겨진 고인돌 같은 돌도 있지 않은가. 이런 것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심지어 나조차도 어린이였을 때 온 기억이 생생하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을 위해 공원을 만들어준 것이 고마웠다. 그래서인지 HR은 어린이대공원에서 음주가 안 된다고도 했다.
공원의 큰길을 따라 걷다 보니 뭐라 하는지 또렷이 들리지 않는 스피커 방송과 함께 꺄르르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놀이동산 쪽에서 들려왔는데 지금 운영을 하는 건가? 조금 더 걸음을 가까이 하니 확실해졌다. 놀이동산 운영이 걱정될 정도로 손으로 헤아릴 정도의 사람들이 바이킹을 타고 또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뭘 탈까 하다가 더위를 식힐 겸 후룸라이드를 타러 갔다. 드드드득 레일 소리가 만들어내는 서늘함과 나무배가 지상으로 내리 꽂히면서 만들어내는 미세한 물보라를 기대했지만, 가뜩이나 손님이 적은 데 물을 채워둘 수가 없어서 그런지 후룸라이드 입구에는 '쉽니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선택한 것이 패미리 코스타. 내 마지막 기억 속에서는 분명 청룡열차였는데 이제는 이름도 멋을 한껏 부려 영어로 세련되게 지었다. 물론 패밀리가 아니라 패미리, 코스터가 아니라 코스타였지만. 1분이면 한 바퀴 도는 앙증맞은 레일이었지만, 나는 무서워서 소리도 못 내지르고 내려왔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후문으로 나와 그대로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는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했는데, 회전율을 높이기 위한 전략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에어컨 바람이 셌다. 카페에는 코로나 시국답게 삼삼오오가 아닌 둘둘삼삼으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창가를 바라보는 자리에는 중년부부로 보이는 듯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성실한 알바생은 둘둘삼삼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지나쳐 그 중년부부에게 한 자리 띄워서 앉아달라고 했는데, 나는 그 알바생이 절대 악의로 두 사람을 띄어놓은 것이 아니라 창가 자리는 무조건 한 자리 띄어 앉는다고 머릿속에 입력한 것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융통성이라기보다 응용능력이 떨어진다고 할까, 그 모습이 나를 보는 것 같아 뜨끔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다음에 HR을 만날 때는 우리 모두 지금보다 두 살을 더 먹은 때가 될 것이다. SH는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인사를 하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