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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우 Aug 24. 2021

양반님네, 오늘 십년감수했다.

2021년 8월 열둘째날의 단어들

글 꽤나 읽었다는 양반이 느릿느릿 집으로 향한다. 팔자 좋게 콧노래 흥얼거리며 시선을 여기저기 돌려가며 걸음을 옮기는데, 아이고 세상에.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양반네 논둑에 구멍이 나서 물이 졸졸졸 새는 것이 아닌가. 이거 이러다 논에 대어 둔 물이 다 빠지겠구나 싶어 논둑을 향해 달음박질을 한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해서는 체면이고 뭐고 일단 허리 숙여 논물에 젖은 흙은 한 움큼 집어다가 구멍을 틀어막는다. 휴 마침 이 앞을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한 해 농사 다 망칠 뻔했구나, 싶은데 구멍에 틀어넣은 흙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것도 좀 전보다도 더 큰 구멍을 내면서. 당황한 양반은 다시금 흙을 집어 구멍을 막고 손바닥으로 정성스레 두들겨주는데, 얼마 가지 않아 물길을 막던 흙이 맥없이 흘러내린다. 야 이거 야단 났다. 이제는 졸졸졸이 아니라 줄줄줄이다. 다급해진 양반은 옷자락 휘날리며 동리로 뛰어가서는 헉헉거리며 장정들을 불러 모은다.


이보게들. 큰일 났네 큰일 났어.

무슨 일이십니까 양반님네요. 큰일이라도 났습니까.

큰일이지 큰일이야. 당장 도구들 들고 따라오시게.

아니 무슨 일이길래 도구들까정. 산에서 호랑이라도 내려왔답니까.

아 글쎄 더 큰일이래도. 서두르시게.


힘 꽤나 쓴다는 장정들이 저마다 농기구 하나씩을 손에 쥐고 양반님네 뒤를 따른다. 가는 방향이 산이 아니라 그 반대쪽인 걸로 보아 호랑이가 출몰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걸음을 재촉한다. 글 꽤나 읽으신 양반님네가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양반님네 뒤꽁무니 쫓아 따라가 보니 논둑이다. 당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이 사람들아. 어찌 그리 태평하게 가만히들 서있나 그래. 자기 집 논이 아니라고 그런가들.

어인 연유인지 말씀을 해주셔야...

아니 저기 보시게. 우리집 논둑에서 물이 줄줄줄 새고 있지 않냔 말일세!

(수근수근)

내 아무리 저 구멍을 틀어막아도 구멍이 점점 커지기만 하니 큰일이다 이 말일세!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앞장선 장정 하나가 흙을 퍼 논둑으로 올라간다. 그러고는 논둑 안쪽을 메우니 줄줄줄 흐르던 물줄기가 딱 멈췄다. 양반님네 눈은 휘둥그레지고 장정은 흙을 훌훌 털며 내려온다. 양반님네요, 이제 괜찮을 겁니다. 모두들 너털웃음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입을 앙 다물며 막아낸다. 아무래도 이 양반, 물길보다는 아랫사람 웃음 틀어막는 재주가 있나 보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은 장정들 뒤를 양반님네가 졸래졸래 쫓는다.


기계가 고장 난 것 같은데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있는 나를 보고서는 N이 후다닥 달려와 해결해줬다. 양반님네, 오늘 십년감수했다.




ゆっとりと : 느릿느릿

鼻歌(はなうた) : 콧노래

穴を詰める(あなをつめる) : 구멍을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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