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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현 Feb 20. 2019

02 퇴사에 마침표를 찍은 이메일

2년 6개월 받고, 3개월 더?

퇴사 보고 30분 전, 이메일을 열다


 2018년 2월, 단단하게 묶여있는 '퇴사 고민'이란 매듭을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저 이만하면 퇴사해도 '괜찮겠다'는 불가사의한 감각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안정적인 회사생활이라는 루틴도 놓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몇 달째 매우 헛헛한 일상을 보냈다. 회사생활 대나무 숲이 되어주던 팟캐스트 제작도 흐지부지해버리고, SOS를 외치는 맑네도 결국 구하지 못했다. 낮에는 광화문 오피스의 사람으로 몸을 숨기다, 밤에는 사이다를 뿜는 퇴사러로 변신해야 되는데, 변신 능력을 잃어버린 히어로처럼 엉엉 울었다. 이러다가 이 세상엔 광화문 오피스의 사람만 남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Outlook 메일함에 새 편지가 도착했다.   

"2주 후에 APAC 본사에서 신규 서비스 training workshop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김가현 사원이 참석 바랍니다. 출장 보고는 금 주 내로 상신하세요."

APAC 본사가 있는 싱가포르로 출장 일정이 잡혀버린 것이다. 한국시장에 론칭할 신규 서비스를 교육받는 임무도 덤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신입 생활이 3년이면, '부장어'를 번역할 줄 안다고, 이메일에 쓰여있는 지시사항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껏 알 수 있었다. 부장님 말씀은 단순히 출장을 다녀.오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싱가포르 왕복 여행 아님 주의) 출장은 절대 출장으로만 끝나지 않는 법이다. 즉, 부장님이 이메일에 꼭꼭 숨겨놓으신 깊은 뜻은... 


싱가포르 교육을 요약정리해서 회사 구성원들에게 내부 교육하기 (교육내용은 너만 알고 있잖니?) 

신규 서비스 매뉴얼을 한국어로 제작해서 고객사에 뿌리기 (교육받으러 네가 다녀왔잖니?) 

교육내용 그대로 서비스가 실제 100% 작동하는지 API 테스트하기 (교육에서 이 정도는 배웠지?)

영업팀과 고객사에 방문해서 시연하기 (제일 잘 아는 사람이 가야겠지?)

협력사 개발자들 대상으로 해당 기능 교육하기 (더 말하면 입 아프지?)  


위에 적힌 모든 업무들을 감당하겠냐는 뜻이다. 귀국 편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새끼 업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는 뜻이며, 그 말인즉슨, 출장에 다녀오면 적어도 3개월은 더 회사에 다녀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모든 걸 감당하시겠습니까?


 이메일을 읽으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싱가포르에 다녀오는 건 너무 좋고, 분명 회사생활에 refresh가 되겠지, 그런데 그 사이에 퇴사 욕구가 가라앉으면 어쩌지? 교육을 받고 오면 지금 업무도 조금 더 손에 익을 거야, 그런데 나 내년에 서른인데, 나갈 거면 빨리 나가야 하지 않나? 난 왜 이리 우유부단하게 생겨먹은 거지? 2년 반 동안 한 그 모든 일이 퇴사준비였는데 아직도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거야?? 


 결국, 부장님의 메일은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리는 매운 손이 되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이메일을 다시 한번 읽어본 후, 잠시 숨을 고른 뒤 아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약 5분 간 <아에이오우> 연습과 함께 급하게 메모한 퇴사 멘트를 약 세 번 정도 리딩 한 다음, 자리로 돌아와 메신저를 켰다.  


'부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실에서 뵈어도 될까요?' 


그렇게 2018년 2월, 인생 첫 퇴사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퇴사 절차는 짧고, 작별인사는 길다

 회사의 문턱을 넘는 일은 무려 2개월에 걸친 별 다섯 개(★★★★★)의 난코스였는데, 그에 비해 퇴사 절차는 너무나도 심플해 쿨 내(?)가 느껴질 정도였다. 팀장보고-서류작성-법인카드 & ID카드 반납 끝. 하지만, 여기에도 결코 쉽지 않았던 절차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 직원들에게 남길 작별인사 이메일을 쓰는 일이었다. 모든 출근길이 가벼웠던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생애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천방지축에 건방진 신입사원이었던 나를 따뜻하게 품어준 동료들이 있었다.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는, 또 문득 생각날 때마다 읽어보고 싶은 그런 작별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머리털을 쥐어뜯을 때, 머릿속을 스치는 글이 있었다. 


내 엉뚱하고 모자란 아이디어를 재미있게 여겨주고, 

생각만 앞서가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구멍들을 메울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지도해 준 선배님들은 정말이지 하느님, 부처님 같은 존재입니다.

평생 그분들을 향해 어찌 발 뻗고 잘 수 있을까요!

뒤돌아보면 당시의 나는 건방진 말만 늘어놓고 실력은 하나도 없는 데다가 

성가시기만 한 신입이었다는 것이 100퍼센트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귀여운 구석이 털끝만큼도 없는 그런 나를,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여럿 계셨다는 것은, 

정말이지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는 <회사>라는 곳이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습니다. "

 

- 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를 다루는 책을 잡히는 대로 읽어대던 시절 주워모은 글이다. 정말이지 덜어낼 것도 더할 것도 없이, 내가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전부였다. 이 글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작별 이메일을 완성했고, 그 후에 몇 번이나 주고받은 이메일은 차곡차곡 따로 모아두었다. 그리고 조직 밖에서 외로울 때마다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냥 조금만 더 다녀볼까?  


 아주 잠깐, '이왕 2년 6개월이나 다닌 회사, 조금만 더 다녀볼까?'라고 생각했다. 이번 출장이 좋은 핑계가 되어줄 테니까. 퇴사는 분명 두려운 일이다. 나의 소중한 월급부터 명함, 동료, 복리후생, 사회에서의 위치 전부를 내려놓겠다는 각오로만 할 수 있다. 각오의 무게가 크면 클수록 언제든 마음이 약해지고 다짐이 물렁해질 수 있다. '3개월만 더?'라는 시작으로, 3년을 더 회사에 묶일지, 13년을 더 뭉개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강하게 마음먹었을 때 바로 저지르고 밀고 나가자는 의지를 다시 세웠다. 



퇴사해도 괜찮겠다는 감각

 사표를 낼까 말까 고민하면서도, 어느 구석에는 '이제 퇴사해도 괜찮지 않나?'라는 감각이 걸쳐져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자꾸 되물었다. 혹시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어설픈 치기 아니야? 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 감각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거지? 

 참 불가사의한 확신, 혹은 믿음과도 같은 그 느낌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한 동안 알지 못했다. 


 회사를 나와서도 한참 뒤에야 비로소 그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 힌트는, 제현주 작가의 <일하는 마음>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였다. 


직장생활은 아마도 마라톤 풀코스쯤은 되는 하나의 트랙이다. 그 트랙에서 벗어나 단번에 그만한 길이에 맞먹을 나만의 트랙을 찾아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망설이며 잡다한 탐색을 해오던 시간을 두어해 보내고 이제 준비가 되었다고 믿게 된 것은 1킬로미터 트랙 정도는 구성할 힘이 생겼기 때문이다. 직장 일을 대체할 단 한 가지, 직장인 대신 이름 붙일 '무엇'은 찾지 못했지만, 내일 하루는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나만의 1킬로미터 트랙인 셈이었다. 그렇게 1킬로미터씩 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나는 이미 100% 순도의 직장인에서 벗어나, 겨우 66.7% 정도의 직장인이었다. 나는 그렇게 주어진 풀코스 트랙에서 스스로 걸어 내려왔다.  
                                                                                                                                     <일하는 마음>, 제현주


 퇴사를 준비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다. 먹고 살 돈이 없는 거? 부모님과 친구들의 질타? 사회에 내 자리가 없다는 소외감? 혹은 무기력함? 나에게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상황은 '할 일'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몰입할 일이 있을 때 가장 텐션이 높고 행복한 사람이다) 돈은 회사를 다니면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사는 노력을 통해 바짝 모을 수 있다. 잔소리나 질타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 된다. 하지만, '일'이라는 녀석은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이 두려움을 넘었던 구체적인 경험이 바로 팟캐스트 <내-일은 가볍게>를 제작하면서이다.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고, 동료를 구하고, 아이디어를 현실에 꺼내놓는 작업. 일을 잘 다듬어 마무리하고, 다음 연결고리를 마련하는 행위. 일련의 그 모든 과정을 팟캐스트 <내-일은 가볍게>에서 해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나의 1km 트랙이었다. 이다음에도 팟캐스트보다는 한 뼘쯤 더 어려운 일, 손이 꽤 많이 가는 일,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도 분명 잘 해낼 거라는 믿음이 내 안에 단단하게 뿌리내렸다. 


내 동료는 내가 찾아!

내 판은 내가 깔아!

내 일은 내가 만들어!


그렇게 조직 밖에서 내 자리의 터를 닦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잘하는 일을 더 빨리하기 위한 시간이 아닌,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 하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꼭 만나야 할 동료, 꼭 넘어서고 싶은 일, 꼭 해내야 할 목표를 적어두고 하나 씩 지워나가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해보기로 했다.  



tip. 퇴사하면서 남긴 작별 이메일, 그리고 동료들의 답장이 남아있다면, 다시 한번 꺼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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