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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현 Feb 23. 2019

05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희.로. 애.락

영원한 'Best regards' 파티, 렛츠 기릿!

Foreign Company, 외국계 회사란 특정 회사가 애초 설립된 지역과는 다른 관할 지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별도 등록한 회사를 지칭할 목적으로 미국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Wikipedia 

 

 지극히 전형적인 한국식 공채시험을 거쳐 (무려 한자시험도 보았다!) 대기업에 입사한 나는, 동기들과 각자의  업무를 놓고 이모저모 따져볼수록 유독 나만을 따라오는 '+a'란 녀석을 감지하게 되었다. 시간이 꽤 지난 뒤,  '+a'란 것은 AsianaSabre 출생 스토리와 함께 딸려온 업무의 백그라운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AsianaSabre라는 회사명은 사실 한 번에 정확히 읽어내기가 어렵다. 놀랍게도 '아시아나세이버'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눈에 익숙한 단어 Asiana는 아시아나항공이며, 뒤에 붙은 Sabre는 Travel business에 필요한 여러 가지 IT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계 회사 세이버이다. 아시아나항공에는 주로 항공권 예약·발권과 관련된 IT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AsianaSabre는, 말하자면, 아시아나항공과 Sabre가 의기투합하여 설립한 합작투자회사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나는 매 번 소속을 밝히거나 회사를 소개할 때마다   '아시아나면 아시아나지, Sabre는 뭐냐'라는 질문을 받기 시작했고, 우리 부모님은 여전히 내가 아시아나항공에 다녔던 줄로 알고 계신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식구들 사이에서는 우리 회사가 해외입양아(?) 정도로 취급되어, 타 계열사 직원들과 함께 일 할 때에도 약간은 서먹서먹하고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되어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시아나'사브레'로 발음하고, 이럴바엔 회사명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부장님께서 한 이메일을 영어로 번역해보라는 과제를 내주셨다. 내 글을 보시더니, '아니, 우리 김가현 씨가 무려 '관계대명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네!'라며 멋쩍어질 정도의 칭찬을 한 움큼 퍼주셨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갑.분.외의 복선쯤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분위기. 외국계의 상황에 놓이면서, 사내 문화는 한국식이나 업무내용은 글로벌한, 다시 말하면 가장 안 좋은 것과 가장 안 좋은 것이 만나면서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희로애락의 풍경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분위기 외국계의 상황들  

- 매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오늘의 'small talk'를 고민한다.

- 김가현보다 Marina를 찾는 직원이 더 많다.

- 끝인사는 '감사합니다'보다 'best regards'가 익숙하다.

- 인터넷 창 고정 탭에는 Google translation이 기본이다!!   

- 나와 함께 일 하는 동료는 옆 책상이 아닌, Webex 스크린 안에 있다. 

- 어쩌다 내 동료를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점심식사 메뉴부터 고민스럽다.

- 회사에서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 매뉴얼은 영어이다.  

- 회사의 이런저런 리소스가 지구촌 곳곳에 퍼져있다. (담당자 찾아 지구 한 바퀴)

- 우편발송은 우체국이 아니라, DHL아저씨를 통해서!  



 이러한 회사의 신분? 체질? 정체성이 나에게 때론 즐거움을 주거나 견문을 넓혀주기도, 그러나 이따금 분노의 키보드질을 하게도 만들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런 희로애락들을 상황 별 예시와 함께 적어본다.  



喜(희), 그 모든 순간이 있어 보였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해외출장.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동료들과 루프탑 bar에서 맥주를 한 잔 기울이다 보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소위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떠오른다. 그게 내 모습과 겹쳐 보이면, '오늘 나 쫌 멋있는데?' 라거나, '성공한 인생이란 혹시 이런 것일까?'라는 도취감에 빠지기 쉽다.   

 회사 미팅룸에서 컨퍼런스콜을 진행 중이다. 유럽에서 디지털노마드로 일 하는 개발자,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는 서비스 기획자, 그리고 미국 본사에 있는 프로젝트 매니저와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심지어 그들이 놓친 포인트를 감히 내가 짚어줄 때도 있다! 뭔가 이 세상 중요한 일은 내가 다 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취한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기쁨은 이렇게 있어 보이는 그 모든 순간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것은 억겁과도 같은 근무 시간 중에 찾아오는 찰나의 환희, 기쁨, 광명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환희의 순간이 나를 더 열심히 일 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nglish로 Presentation을 하니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은가
English Boss와 함께 있으니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은가
상패에 이름이 English로 적혀있으니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은가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또 하나의 기쁨은, 대한민국이 가진 강점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글로벌 무대 위에서 여러 플레이어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업무 성과나 실적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게 된다. 


 내가 일하면서 포착했던 한국이 가진 강점은, 꼼꼼함과 치밀함 그리고 까다로운 안목에 있었다. BFM 프로젝트를 하며 겪은 일이다. BFM 테스트 결과를 분석하며, 본사에 여러 차례 아주 끈질기게 오류 report를 보냈다. 하는 수 없이 Sabre HQ 개발자가 직접 한국으로 출장을 와서 함께 테스트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가 report 했던 오류 상황 List를 죽- 훑어보더니, 정말 혀를 내두르면서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테스트한 시장은 한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대체 이런 오류는 어떻게 발견한 거야?! BFM을 직접 개발한 사람마저 인정할 정도였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만큼 까다롭고 철저하며 콧대가 높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서비스 품질에 대한 안목만큼은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 나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 또한, BFM 서비스 품질개선에 한국시장이 크게 기여했다는 데에 나의 2년 6개월 커리어를 걸고(?) 자부한다. 한국인의 매운맛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관련기사, 한국시장은 뛰어난 테스트베드, https://news.joins.com/article/22721887



怒(노), 담당자 찾아 지구 한 바퀴


 '외국계 회사는 글로벌 무대에서 일한다.' 이 말은 다만 하나의 문장에 지나지 않았다, AsianaSabre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교과서적으로 이 말을 인지했을 때, 내가 느끼는 것은 오로지 선망과 부러움 뿐이었다.  얼마 뒤, 본사 담당자를 찾아 랜선을 타고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다음 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분노뿐이었다. 외국계 회사는 대부분 업무를 단위 별로 지구촌 곳곳에 쪼개어놓는다. 이를테면, 회계팀은 인도에, 개발팀은 유럽에, 영업팀은 싱가포르에 존재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간단한 일을 하나 처리하는 데에도 담당자를 찾는 데에만 일주일을 넘기는 일이 일쑤였다. 이 프로세스에 인내심이 생긴 것은 내가 입사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다. 

매일매일 짜릿한 랜선 여행

 게다가, 10만큼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100 또는 1000만큼의 로컬 문화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일 진행속도가 순수(?) 한국 회사보다 3~4배쯤 더딘 것 같다. 앞서 언급한 Expedia 해외결제수수료 건이 그러한 사례이다. 본사 직원들의 기본적인 마인드셋은 '미국 혹은 유럽이 가진 비즈니스 관행, 실무 프로세스가 정상적이고 선진적인 것'이다. 로컬 국가에 뿌리내린 실무 프로세스가 있다면, 그것은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어떤 것이지 본사 서비스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내가 일하면서 본사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피드백은, '한국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라, 프로세스를 선진적으로 개선해라'는 것이었다.


 처음 이러한 피드백을 받았을 때는 정말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로컬 담당자인 내가 본사 시스템을 판매해서 돈을 벌어주겠다는데, 왜 본사 직원들을 설득하는 일까지 해야만 하지? 하지만, 몇 차례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한국 시장에 맞추어 서비스를 개선하는데 들어가는 비용과 한국 시장이 가진 잠재적 수익을 비교해보았을 때 본사에는 적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본사의 태도에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 생겼다. 

 

 또한, 외국계 회사는 오로지 능력에 따라 대접받는 곳이다. 직원 평가는 철저히 그가 일군 성과 위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기 일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있고, 본인이 맡은 업무 안에서 최대 성과를 내야 하다 보니 서로 일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중간에 끼어있는 Grey 한 영역, 혹은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담당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일감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Ugly 한 행태를 자주 볼 수 있었다. 



哀(애), 작아서 서러운 한국시장
나: 항공권 운임규정을 조회하는 API를 한국에서도 사용하고 싶은데, 한국어도 제공해줄 수 있어?
     번역 작업은 전부 다 우리가 할게, DB에 등록하기만 해 줘. 

Judy: 음- 불가능해, HQ가 지원해줄 수 없어.

나: 왜?? 중국어는 나오던데? 한국어도 그렇게 해주면 되잖아? DB포맷은 우리가 맞춰서 보낸다니까?

Judy: 한국과 중국은 달라, 중국은 Sabre에게 아주 중요한 시장이야. APAC 매출이 blabla..
          앞으로도 성장할 blabla...
나: ㅡ.ㅡ^
나: Sabre API 중에 인기 있는 도착지 Top 10 데이터 제공하는 거, 한국시장에 도입하려고 해. 
      API Test 할 수 있게 open 해줄 수 있어? 가격정책은 어떻게 돼?

Tom: 알아봤는데, Korea data는 수집된 게 없어서 그 기능을 제대로 쓸 수가 없어.

나: 응, 알아. 사용하면서 data 쌓아나가면 돼. 내가 먼저 test 해봐야 고객한테 안내할 수 있는데,  
      API open 해줄래? 

(3일 후)

Tom: 음- 일단 알겠어.
          Korea에 API 사용할 고객사가 있긴 있어? 연간 transaction이 얼마야? 

나: 기능을 먼저 파악하고 고객사 의향을 조사해야 알 수 있지! API 언제 오픈해줄 거야?

(7일 후)

Tom:  Korea에 오픈해줄 수 있을지 내부에서 확인할게, 기다려줘.

나: 이제 확인한다고? 지지난 주에 요청했는데? 

Tom: 미안, 다른 일로 바빠서

나:...

 위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글로벌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국은 규모가 매우 작은 시장이다. 따라서 수익성을 고려한 본사 정책에 따라 한국에는 프리미엄 기능을 오픈하지 않거나, 추가적인 서비스에는 제외시키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회사는 대부분이 소규모 지사(支社) 여서 본사의 전략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친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이런데에 있을 수 있다. 특히, 이웃나라 중국과 비교하며, 한국시장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쌀쌀맞다고 느낄 때에는 서러움 대폭발이었다. 



樂(락), 쌓이고 또 쌓이는 글로벌 감각


 회사를 다닐 때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사례를 발견할 때이다. 외국계 회사의 장점은 그런 짜릿한 순간이 훨씬 더 자주 온다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여 Conference call를 할 때 특히나 배우는 점이 많다. 회의 주도를 잘하는 직원, small talk로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드는 직원, meeting note를 기갈나게 작성하는 직원, 누락된 이슈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직원 등.. 지구촌 곳곳에서 활약하는 업계 내 좋은 선배들을 글로벌 단위로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외국계 회사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장점을 내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주었다. 작게는 business email을 작성하는 법, 식사예절, 의전 스킬부터 크게는 일을 이끌고 나가는 힘과 카리스마까지. 내 안에 글로벌 감각이 차곡차곡 쌓이는 만큼 애사심도 차곡차곡 커졌다. 더불어, 전 세계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국 시장의 위치는 어디쯤이고, 한국이 가진 강점은 무엇이고, 그중에서 내가 활약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되니 현실감각이 날카롭게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tip.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서 애썼다.
이렇게 어느 회사에나 '장과 단'은 존재한다. 내가 몸 담은 조직의 장단점을 꼼꼼히 적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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