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방과후학교> 강사 데뷔기
현대자동차 그룹이 신입사원 정기공채를 완전폐지했다. 매 해 1만 명 넘는 대졸자를 흡수해 온 그룹사가 공채 폐지에 스타트를 끊은 만큼, 앞으로 채용시장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뀔지 모두 주목하고 있다. 그 간 대기업은 졸업생을 한 번에 왕창 뽑아놓고서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며 내 사람(?)으로 만드는 관행을 이어왔다. 당장 한 달 치 월급을 벌어오지 못하는 신입사원, 이들을 5년, 10년 키워내겠다는 각오로 회사가 통 큰 투자를 감행했기에 그 간 공개채용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대기업은 무게중심을 '효율' 쪽으로 옮기는데 시동을 걸고있다. 공채과정에서 짊어져온 부담을 내려놓고, 이제 준비된 인재를 뽑아 바로 현업에 투입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채용계 내 지각변동은 취업준비생에게 유리할까, 불리할까? 구직자들의 이런저런 반응이 엇갈리고 있으나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본질에 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이 회사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나? 마침내 나는 왜 '그 일'을 선택했는가?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2/2019022201478.html
저는 전공선택에 실패했나요?
4년 전 봄, 상반기 공채시즌을 온 몸으로 통과하며 나는 이 질문을 곱씹었다. 졸업을 앞둔 내 목표는 그저 남들이 알만한 회사에 입사하는 것. 대기업은 1년 중 단 두 번뿐인 공채 시즌에만 채용의 문을 열어둔다. 따라서 단기간에 전력을 다해 최대한 많은 입사원서를 제출해야만 대기업 문턱을 넘을 확률(?)이 높아진다. 공채시즌 시작과 동시에 해야 할 일은 바로 엑셀파일 만들기. 나는 대기업 입사뽀개기.xls 란 제목의 파일을 만들고, 국내 대기업 순위 1번부터 100번까지의 회사명을 나열한 다음, 실제 지원가능한 직무를 그 옆에 리스트 업 했다.
왜냐고? 인문계 전공생은 전공제한에 걸려 애초에 이력서 제출조차 불가한 직무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사/회계/총무는 상경계열 졸업자만, R&D는 공학계열 졸업자만 지원이 가능하다.)
평범한 문과생이 공채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00전공제한'이라는 단서에 발 묶여, 100개의 회사목록이 한 줄 한줄 줄어들 때의 그 초조함이란... 언젠가 시계태엽을 돌려서 열 아홉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1 지망 전공란에 감히 인문학과를 야무지게 적어놓은 내 손등을 때려줘야지-라며 매일매일 이를 갈았다. 이제 겨우 한 줌만큼 추려진 회사에 차례대로 이력서를 넣고, 그렇게 뿌린 이력서 갯수만큼 도로 거두어들인 불합격 문자에도 어느 순간 마음 상할 일이 없게 되었다(고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공채시즌을 근근히 버텨냈다.
작년 가을, <외롭지 않은 방과후학교> 강연 제안을 받았을 때, 잠시 이런 옛 추억을 떠올려보았다. <외롭지 않은 방과후학교>는 전공을 초월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선배들이 '일과 커리어, 전문성'에 대해 다양한 각도를 제시하는 진로교육 프로그램이다. 숙명여대 미디어학과 3, 4학년생 졸업예정자들과, 미디어학과를 졸업했으나 전공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선배들이 만나 함께 일 고민을 나누는 자리였다. 감사하게도 이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들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제안 이메일은 '여전히 많은 졸업예정자들이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과정에서 전공을 둘러싼 내적갈등을 겪고 있다' 라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몇 년 전 내가 했던 고민과 지금 후배들이 하는 고민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에 크게 놀랐다. 산업지형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 생각해보니 인터넷을 켜고 '00대학 경력개발센터'를 검색해서 메인화면에 뜬 취업교육 프로그램만 살펴봐도 알 수 있었다. 합격을 부르는 이미지 컨설팅, 면접 돌발상황 Skill-up 처럼 '경력개발'이라는 제목 아래 묶이는 내용들은 여전히 취업테크닉을 체득하기 위한 방법론 일색이다.
<외롭지 않은 방과후학교>의 차별지점은 '일'이란 무엇인가, '커리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을 정면으로 보고있다는 것이었다. 기존 취업교육 프로그램이 외면했던 혹은 거부했던, 그러나 사회에 진출한 후배들이 머지않아 고민하게 될 질문을 정확히 짚어내서 제대로 다룬다는 기획에 깊이 감응했다. 그래서 기획의 일부로 함께 참여할 수 있음에 매우 감사하며 답장을 했었다. 이하는 <외롭지 않은 방과후학교> 소개 글 일부이다.
'전공을 살린다'는 말은 가능한 말일까요?
또는 전공과 상관없는 일을 하면 전공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전공을 선택했는데, 전공과 일자리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가는 것만 같습니다. <외롭지 않은 방과후학교>에서는 이 간극을 즐거워하며 전공과 상관없는 진로를 선택하고, 자기 일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선배들을 만나 질문을 던져봅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 각자의 답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졸업 후에도 함께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동료가 되어봅니다.
- 외롭지 않은 기획자학교 Brunch 중에서
조직은 커리어를 개발해주지 않는다
나는 일부러 단호하고 선언적이며, 조금은 시니컬한 문장을 강의 제목으로 세웠다. 우리는 이제 너무나도 잘 안다, '대학입학'이 곧 '취업보장'과 같은 말이 아님을. 마찬가지로 회사생활을 조금 해보면, 회사에 몸 담은 시간과 커리어개발이 결코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런 현실을 후배들이 입사하기 전에 빨리 깨우쳐서 보다 영리한 회사생활을 이어나가기 바랐다. 그런 마음을 녹여내어 만든 강의 제목이다.
강의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타고난 성실함(?)을 바탕으로 4년 간 각종 스펙을 차곡차곡 쌓은 대학시절,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던 뜻밖의 종착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틀어진 인생 방향을 원하는대로 돌려놓기 위한 고군분투의 작업들과 그리고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안에서도 기어코 내 쓸모를 발견한 모든 과정. 사이드프로젝트를 통해 내 안에 눌려진 욕망을 풀어내며 커리어를 길어올리는 훈련에 대한 이야기이다. 2인분 같은 1인분 요리를 만들어내는 심정으로, 내 모든 필살기를 촘촘하게 모아 꾹꾹 눌러담은 1시간짜리 강의였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에 허무함이 컸는데,
뭐든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걸 믿게 됬어요
이 맛에 강의를 하는걸까? 수강생이 건넨 한 마디 말로 그 간의 긴장감과 노고들이 다 녹아내렸다. 학부시절에도, 또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20분을 넘기는 발표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강의 준비하는동안 다른 무엇보다 '60분'이란 시간을 채워야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냥 60분을 때우는 게 아니라, 무대를 준비하느라 애쓴 기획자도, 목요일 저녁 황금시간을 쪼개어 참석한 수강생도, 또 강의를 준비한 나도 모두 만족하는 60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위염까지 앓아가면서 콘텐츠를 완성했는데, 어찌되었든 강의 끝까지 내 이야기에 졸았던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 나는 대만족하고 후련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흩어져있던 생각을 잘 그러모아서 보기좋게 다듬고 내놓는 일,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삭- 흡수되었을 때 나오는 표정과 눈빛, 모든 반응들. 이 일련의 과정을 강의하면서 생생하게 경험했다. 어릴 때는 '와- 강의 한 시간하는데 페이가 몇 십 만원이나 돼?' 이거야말로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고수익직종이라며 감탄했는데, 직접 해보니 강의는 돈을 벌기위해서만 하는 일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일단 강의를 준비하는 데 투입되는 에너지가 진짜 크다. 오히려 나는 강의준비할 때 '이렇게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을 왜 하는 걸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 괴로움이 지나가고 끝에 무엇이 오는지 알고나니 다시 한 번 무대에 서고싶다는 강력한 욕망을 품게 되었다.
아직은 꼬꼬마 쪼렙 강사인 나는 외운 것들을 쏟아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심지어 강의하는 동안 열심히 아이컨택했던 옆자리 수강생 얼굴을, 강의 끝나고 새하얗게 잊어버렸을만큼 긴장했다.) 하지만 중간중간 눈을 마주치고 생각을 나누고 또 호응을 주고받던 그 에너지는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또는 없는 기회도 만들어서) 더 자주 무대에 오르고 싶다. 더 여러 번 이 마이크를 들고 싶다. 이번에는 내 경험을 위주로 콘텐츠를 만들었다면, 다음에는 객관적인 자료를 갈무리해서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형태의 강의도 만들어보고 싶다.
이런저런 일 형태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만나본 '강사'라는 일. 청중과 만나는 모든 순간, 성장하고 있다는 감각이 오감으로 느껴지는, 정말 강력하고 매력적인 일이다. 지금도 나는 어떤 무대에서 다시 한 번 마이크를 들 수 있을지 염탐(?) 중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일감 제안은 사랑임을 전한다. ( 제안은 작가프로필에서 :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