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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07. 2021

얼마예요?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환율


본 에피소드에는 금액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2003년에 기록한 내용으로, 현재와는 금액의 차익이 있다는 것을 참고해주세요.

제가 업로드하고 있는 모든 글들은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으니, 

정확한 필리핀 생활의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검색사이트를 활용해주세요. ^^/




“오늘은 얼마야?”

“25예요.”

테미의 대답에 모두들 시무룩해져서 말이 없었다. 

식사 시간에 모이면 자주 나오는 얘기 중 하나는 바로 환율정보에 관한 것이다.

 

필리핀에 올 때만 해도 20을 넘지 않았는데, 어느새 25까지 치닫고 있었다. 

20이라는 건, 1페소를 사기 위해 20원이 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환율이 25까지 올랐다면 1페소를 사기 위해 25원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 

고작 5원 올랐을 뿐인데 이렇게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 한 달 생활하는데, 평균 5만 페소 정도가 필요하다면, 

환율이 20일 때와 25일 때는 25만 원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계산하기 쉽도록 5의 배수로 예를 들었을 뿐, 실제로 5만 페소까지 필요하진 않았다) 


50,000 X 20 = 1,000,000 원

50,000 X 25 = 1,250,000 원


앉은자리에서 하루아침에 25만 원이란 돈을 고스란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피리핀에선 25만 원이면 가까운 섬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큰돈이다. 

그런 큰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날려 버리니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특히 하숙비 지불과 같은 목돈을 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초초함은 극에 달한다. 

하숙비는 한 달 전과 변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몇십만 원이 오른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율의 상승은 생활 패턴도 바뀌게 했다. 

저녁 무렵, 가벼운 마음으로 바를 향하던 발걸음도 멈춰야 했다. 

옷이나 신발 따위도 당분간은 구매 금지 품목에 올라가고 

가급적 외출을 꺼리며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하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우리나라보다 물가가 저렴한 필리핀에서. 

돈이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있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대부분 한 달치 생활비를 찾아놓고 쓰는데 그 돈이 똑 떨어진 순간, ‘알거지’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땐 신경 쓰지도 않았던 환율이 

필리핀에 온 순간부터는 매일 꼼꼼히 챙겨보는 가장 민감한 부분이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제는 필리핀의 물가가 싸다는 생각은 희미해진다. 

그러고 보면,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처음으로 가계부를 썼다. 

비행기 티켓부터 그동안 지출했던 자잘한 내용까지 기억을 되짚으며 꼼꼼히 적어 내려갔다. 

계산해보니, 마닐라에선 50만 원 정도면 한 달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어떻게 생활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진 않았다. 

어학원 등록비는 제외한 금액이다. 


마닐라가 좋아졌다. 

소소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좋았고, 지금껏 살아온 삶과 다른 삶을 사는 것도 재미있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낙오자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한국과 달리, 마닐라는 나에게 여유를 주었다. 


음엔 그 여유가 멍청해 보이기도 했고 견딜 수 없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나의 삶까지 변화시키고 있었다.


때로는 이러한 여유로움이 걱정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적은 나이가 아니기에 어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조급함도 있고, 

한국으로 돌아가 예전의 생활로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이미 난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필리피노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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