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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Jul 07. 2021

부코 살인사건

낯선 설렘: 필리핀

#필리핀 #마닐라 #코코넛 #부코 #먹거리




필리핀에는 제법 입맛에 맞는 먹을 만한 길거리 음식이 많다. 

과일이나 바비큐가 가장 많고 그 외에 아침식사 대용으로 좋은, 

순두부의 일종인 따호나, 코코넛 음료수 부코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즐겼던 건 부코다. 

한국에선 구경하기도 힘든 코코넛을, 그것도 아주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마실 수 있기에 

필리핀에 있는 동안 맘껏 먹지 않으면 후회가 될 것 같았다.


부코를 파는 어린 P와 친해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P는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고 쪼르르 달려와서는 

어설픈 한국어로 ‘형, 형, 맛있어요. 부코! 부코!’를 외치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마다 난 어린 P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코를 사마셨다. 

비록 몇 마디였지만 한국인에겐 한국어로 대하는 P의 장사 수완이 마음에 들었다. 


반면, P는 언제나 섬뜩한 큰 칼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칼은 두꺼운 코코넛 껍질을 벗겨내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두꺼운 껍질을 벗긴 코코넛의 과즙을 

얼음이 담긴 커다란 통에 부어 설탕물과 섞어 담아 팔았는데,  

코코넛 껍질을 벗기는 작업은 보기에도 무척이나 어려워 보였다. 

나도 한번 해보겠다고 칼을 넘겨받아 해봤는데, 

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의 경우에는 자칫 손가락이 절단될 수도 있는 꽤 무섭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잠이 없는 난 그날도 어김없이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밖은 제법 어두웠지만 

새벽 공기가 무척이나 상쾌했기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산책을 하겠다며 하숙집을 나섰다. 


멀리 나가진 못하고 빌리지 안을 돌아다니는 가벼운 산책이었는데 

빌리지 안은 안전하다는 생각에 너무 마음을 놓았던 게 문제였을까? 


산책을 시작한 지 몇 분도 안돼서, 

골목 저 끝 멀리, 번쩍거리는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고 있는 낯선 그림자가 보였다. 

어두워서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날카로운 쇠붙이는 얼핏 보아도 거대한 칼이 분명했다. 

순간, 머리가 쭈뼛하고 서며 다리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뭐지? 뭐지? 

뭐든 부디 날 발견하지 않기만을 빌었는데, 

이런 바람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지, 

날 발견한 그 날카로운 그림자는 무서운 속도로 내게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나를 목표로 겁나게 뛰어오는 게 맞았다.

마치, <28일 후>에 나오는 분노 바이러스 감염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공포 섞인 비명이 끌어 오르고 있었다. 

평소엔 잘하지도 않는 산책을 왜 했을까 하는 생각부터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부코!”

내 코 앞까지 달려온 그림자는 난데없이 부코를 외쳤다. 


부코?

부코!


다름 아닌 P였다. 

장사를 준비하던 P는 날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늘 들고 다니는 큰 칼을 든 줄도 모르고 전력질주로 달려온 것이다. 


“아, 씨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너무 놀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래, P가 무슨 죄야.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장사를 시작한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어쩌면 ‘형’이라 부르며 좋아했던 내가, 

오늘의 첫 손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저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오!

형!

씨팔!

부코, 씨팔!


어린 P는 금세 내 말(욕)을 배워버렸다. 

그 뜻도 모르고 좋은 말인 줄 알고 계속해서 '씨팔 씨팔' 거렸다.  


‘근데, X팔이 뭐야?’

무의식 중에 내뱉었던 욕이 귀에 꽂혔는지, 

P은 자꾸 '씨팔 씨팔'거리면서 ‘X팔’의 뜻을 내게 물었다. 


아마도, 입에 쫙쫙 달라붙는 한국어가 마음에 들은 모양이고, 

이 역시 나중에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하기에 좋은 수완이 될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분명, 다른 한국인에게 사용하면, 몰매를 맞을게 분명했다. 


“발음이 틀렸어. 씨팔이 아니고 시원.”

"시원? 아까 분명 형이 씨ㅍ...."

"시원!"

".... 시원?"

"응. 시원."

"시원."발음을 고쳐주는 척하며 ‘시원’이라고 했다. 

시원한 부코를 얘기하는 거라고.


"따라 해 봐. 시원 부코!"

"시원 부코!"

그래그래. 뛰어오느라 고생했는데, 

시원한 분코 하나 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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