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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현 Mar 18. 2022

죽음이 당당할 수 없는

서른, 아홉을 보다가

간만에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났다. 

JTBC의 <서른, 아홉> 

여자들의 진한 우정과 

"최고로 행복한 시한부가 되게 할 거야!"

라는 대사에서는 느껴지는 죽음까지도 힘차게 이겨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어제 방영된 에피소드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딸의 불륜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던 어머니.

딸의 친구들까지 죄다 소환시켜 혼을 내던 어머니.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딸이 곧 죽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고분고분 해지고, 그 불륜을 순식간에 이해해 버린다. 


https://tv.jtbc.joins.com/clip/pr10011419/pm10064300/vo10575876/view


남편과의 불륜 사실을 알고 독하게 굴던 아내에게도,

불륜녀는 당당하게 

"조금만 기다려 결국 네가 남아"라고 하고,

내년 여름 전에 죽는다는 말에 입을 다문다. 


불륜이 나쁘다. 

불륜은 문제가 있다.

라는 이야기는 내 관심사는 아니다. 

그건 성인 남녀들끼리 알아서들 풀어가라고 하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마치 죽음이 모든 죄의 면죄부가 되는 듯한 흐름이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시한부는 

살인을 저지르고, 돈을 훔치고, 

아무나 붙잡고 상해를 가해도, 


아. 시한부라고.

그럼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인가?


죽음과 죄는 연관성이 없다. 

결국 자신의 살육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죽어버린 

한때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봐도.

죽었다고 그 죄가 사라져야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너무 나갔다. 

정치 이야기도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좋아하고 있는 

<서른, 아홉>이라는 드라마를 까는 것도 아니다. 


단지. 

죽음이.

죄 앞에서.

당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죽음이 당당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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