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를 나갈 때,
당연히 달러로 환전을 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트래블카드' 한 장만 준비하는 시대가 되었다.
트래블카드.
환전 수수료 무료에 ATM 수수료 무료라고 하는데,
인천 공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환전부터 하는 건, 이제 시대적 착오이지 싶다.
게다가 나의 일정을 살펴보면,
베트남 공항에 도착하면,
바로 픽업 차량이 준비되어 있고,
그렇게 이동해서 도착하는 임시 숙소도
이미 (한국에서) 예약을 다 해놓았기 때문에,
돈을 쓸 일도 없고, 쓸 생각도 없었다.
느긋하게
숙소에 짐을 풀고,
천천히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근처 은행을 알아보고,
동네 탐험도 할 겸, 산책하듯 ATM기에서 현금(VND)을 찾은 뒤,
베트남의 대표 음식인 쌀국수 한 그릇 때리고,
반미와 베트남 커피를 사서 숙소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누구나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 대 쳐 맞기 전까지는 말이다. ㅡ..ㅡ
나의 계획이 삐끗한 건,
베트남에 도착한 직후였다.
"이미그레이션을 바로 통과하지마시고,
그 전에 도착 비자를 받는 곳이 있거든요.
거기서 초청장을 보여주면 도착 비자 90일짜리를 발급해 줍니다."
라는 파견 기관의 안내를 미리 받았었다.
그래서 초청장만 보여주면 되나보다 생각했고,
이미그레이션에서 당당하게 초청장을 보여줬는데....
어? 그냥 도장 쾅쾅이 아니네?
이미그레이션 담당자는 종이 한 장을 내주면서,
사진을 붙이고 내용을 채우란다.
아.... 뭐지?
분명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인데.
내가 아무리 '영포자'라고 해도,
이 정도의 영어는 아는데.
첫 단추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자,
긴장이 밀려온 탓인지.... 뭘 어떻게 써야할 지 멍해졌다.
정말이지,
함께 베트남까지 파견 온 다른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갈 때까지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굳어있었지도 모른다.
"저.... 쓴 것 좀 봐도 될까요?"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다른 선생님들을
나이 많은 내가 이끌고 가도 모자를 판에,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이라니.... ㅜ..ㅜ
하하하하.....
그래도 어쩌겠는가?
모르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니까.
그리고.
여기가 한국이라도 해도,
병원이나 동사무소에 가서 필요한 서류 작성하라고 하면,
한 번에 촤라락~~~~ 써내려가지는 못하지 않은가.
그래 그래,
지금 내가 헤메는 건 당연한 거야.
누구나 처음은 다 서툰 법이지.
아무튼 그렇게 도움을 받아,
이미그레이션 직원이 내민 서류 한 장을
겨우겨우 힘겹게 작성하고 제출을 하자
직원은 손가락으로 한 쪽을 가리키며, 저쪽에 가서 기다리고 한다.
뭔가 기분 나쁘지만....
이미그레이션에서 소란을 피워봤자 득이 될 건 없다.
그렇게 다른 선생님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비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응?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비자를 발급 받는데 50불이 필요하다고 한다.
게다가 이 모든 게,
다 이미 메일로 상세하게 안내를 했다는 것.
ㅡ..ㅡ;;;;
나만.... 메일을 못 받은 거야?
아니면 메일을 받았는데 내가 제대로 안 읽은 거야?
ㅡ..ㅡ;;;;
아니, 그보다....
음.... 50불.... 이 난 없는데....
여기.... 카드 되나요?
될리가 있냐!!
정말 답이 없었다.
이미그레이션을 통과하기 전이라
당연히 ATM기도 없고.
여기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고.
식은 땀이 쏟아지는 건,
베트남의 공기가 덥고 습해서만은 아니겠지....
하아.... ㅡ..ㅡ
결국 다른 선생님들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무려, 스무살 정도 어린!
"저기.... 누구.... 저에게 돈 좀 빌려 주실....?"
여기서 잠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자면,
난 가족끼리도 돈 거래를 하지 않는다.
친구는 물론,
그냥 아는 사람이라면 단 돈 천 원도 빌려주고 않고 빌리지도 않는다.
그건, 엄청난 민폐고,
그건, 나에게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고,
내 인생의 지론을 흔드는 일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새어 나왔을까?
입국을 거절 당해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그게 모두 내가 안내 메일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탓이라 내 책임이라고 해도,
그래서 지금까지 받은 사전교육비, 비행기표값 등등
모든 것을 내가 환불해야 해도,
50불을 위해 돈을 빌려달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텐데....
돈을 빌려달라고 말해버렸다.
말하고도 놀랐다.
내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다니.
"제가 빌려 드릴게요."
A 선생님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갑을 열었다.
인천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나랑 대화를 조금 나눴다는 이유(?)로
차마 내 사정을 외면하지 못(?)한 게 아닐까.... T^T
아.... 열린 지갑에서 50불짜리가 나왔을 때는,
정말....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내려오는 장관이었다.
"감사합니다. 인터넷 연결되자마자 바로 쏠게요."
당연한 말을,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하는 나 자신을 보며....
참 못난 놈이지 싶었다.
조카에게 삥을 뜯는 삼촌의 모습이랄까.
으.... 싫다.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반성하고 결심했다.
그런데....
"네? 95불이라고요?"
정작 비자를 받으려고 하자,
50불이 아니라 95불이란다.
먼저 받은 A선생님은 50불이었는데.
왜 나는 95불이냐고 따졌는데.
베트남어로 뭐라뭐라 하다가, 내가 못 알아듯자....
더는 대꾸도 안해주고 다음 순서의 사람을 부르며
난 돈을 만들어 오라며 뒤로 가란다.
아....
다시 A선생님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렵게 말했다.
"이상한데요.... 저는.... 95불을 내라고 해요...."
돈 안 빌린다며?
뭔 결심이.... 하루도 아니고, 10분도 안가냐...... ㅡ..ㅡ
"그래요? 여기요."
이번에도,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내려왔다.
이번에도, A 선생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무려 20불짜리 세 장을 선뜻 내어 주었다.
"정말 꼭, 인터넷 연결되면 바로....."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오히려 위로하듯,
A선생님은 밝게 웃으며 어서 비자부터 해결하라고 한다.
그렇게,
이미그레이션으로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검색대를 지나,
굳게 닫혀있던 공항 문이 열리고
나는 베트남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센터에서 마중온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흩어지듯 각자의 파견 지역으로 떠났다.
그렇게 난 조금 삐끗했던 계획에서 벗어났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제대로 계획대로 모든 흘러,
무사히 숙소에 들어왔다.
숙소에 들어와,
와이파이를 잡자마자,
110불의 환률을 계산하고,
원화로 입금했다.
아마도 환전을 했다면 수수료 등,
손해가 있었을테니,
그것까지 얼추 계산해서 송금했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창문을 통해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
오긴 왔네.
하늘이
늘 보던 한국의 하늘과
뭐랄까.... 조금은 달라 보이는 걸 보면.
여기는.
베트남이다.
PS1.
오늘의 모든 감사하는 마음을 예슬쌤에게~~
(이럴꺼면.... A선생님이라고 왜 했어? ㅎㅎㅎ)
PS2.
비자 발급비 95불을 계산하기 위해,
110불을 주고,
10불 하고 100,000동을 거슬러 받았다.
그러니까. 거스름돈 15불 중에서,
5불은 100,000동으로 계산(환전)된 건데,
맞을 리가 없잖아!!!
찬찬히 계산을 해보니,
2천원 정도의 차액을 공항의 비자 발급 담당자에게 눈탱이 맞은 꼴이었다.
아씨.... ㅡ..ㅡ+++++++++++++
(나중에 알았지만, 2천원이면 여기서 한국식 김치볶음밥 값은 된다.)
베트남에 오자마자 삥을 뜯기다니!!!!
혹시,
누군가 다음에.
베트남으로 파견을 온다면.
1. 초청장은 꼭 단수비자로 발급받도록 (단수는 50불, 복수면 90불)
2. 트래블카드 너무 믿지 말고 비상금으로 현금은 꼭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