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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 나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셨다. 괜한 짜증과 지적질이 사라지고 대신 걱정과 불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엄마가 불쌍해서,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엄마가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나까지 집을 떠나면 못 견딜 것 같다고 지나가듯 얘기를 하셨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야 할머니의 미움을 받지 않게 되었다.
나도 할머니에게 웬만해서는 늘 ‘알겠습니다.’로 최대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불쌍하니까, 이렇게 해야 엄마가 슬퍼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렇다고 할머니에 대한 마음까지는 변하지 않았다. 늘 구박을 하던 할머니가 여전히 밉고 원망스럽다. 그리고 불쌍했다.
“여보세요? 할머니야. 그래 잘 지내고 있냐? 밥은 잘 챙겨 먹고? 일은 할 만하냐. 할머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복지관에서 공부하고 친구들이랑 놀러 다닌다고 바쁘게 보내고 있으니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사는 동안 죽도록 일하고 독하게 돈을 모으셨다. 할아버지의 도박으로 인한 빚을 갚기 위해. 할아버지가 도박으로 인해 화가 났을 때는 할머니가 모은 돈을 빼앗았고 할머니는 그 돈을 지키려다 몸에 상처도 많이 났다. 그와중에도 용케 돈을 모아서 집도 사고 작은 삼촌 대학도 보내셨다. 그렇게 부지런하게 살아왔기에 지금은 일하기가 너무나 싫고 놀고 싶다고 하셨다. 지금도 놀러 다니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도 가족모임에서 누군가 조금이라도 게을러 보인다면 눈엣가시처럼 말하셨다.
“어쩜 그렇게 돈 쓸 궁리밖에 안 하냐. 아껴야지. 모아야지. 평생 그렇게 살거야?”
열심히 살아온 본인은 노후에 자유로운 삶을 살아도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가족에게는 여전히 본인의 젊을 적 모습처럼 살기를 바라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황혼 이혼을 하셨다. 할아버지를 끔찍이도 싫어 하셨기에 할아버지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다. 그저 장례는 잘 치렀는지 물어보고는 그게 끝이었다. 남편 복이 없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자식들은 그러지 않길 바라셨다. 자식 들중에 엄마만이 할머니의 삶을 되물려 받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고아 출신에 변변한 직업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엄마에게 거짓 된 삶을 보여주고 결혼까지 한 사람이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던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엄마는 결국 아버지와 이혼하고 집을 나왔다.
한 번은 엄마가 혼자서 나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모르는 집에 나를 세워놓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잘 울지 않았던 내가 그날은 무슨 이유인지 땅이 꺼지라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다.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엄마는 결국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갔다.
도무지 방법이 없던 엄마는 결국 할머니의 손을 빌렸다. 할머니의 궃은 소리, 싫은 소리가 누구보다 싫었던 엄마는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있는 집으로 온 것이었다. 우리는 아니 엄마는 그렇게 몇 십년을 눈칫밥 인생을 살았다. 아마도 할머니는 엄마의 모습에서 예전의 자기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같이 딸려 온 내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니 오죽했을까. 할머니부터 이어져 온 삶이 내게도 내려올까? 혹시나 만약에 결혼을 하게된다면 똑같은 절차를 밟게될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노트북 타자기를 두드렸다. 내 글은 아직도 방향을 못잡고 헤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