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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나서 작은 방에 들어갔다. 서랍에 있는 앨범을 꺼내 들어 펼치면 집안 어른들의 젊은 모습, 나의 어린 시절이 박제되어 있었다.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그 시절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사진 속 엄마는 젊고 건강했다. 엄마는 아기 였던 나를 끌어안고 나무에 핀 꽃을 보고 있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엄마는 부모이자 엄마였다. 지금의 나라면 감당할 수 없는 단어 부모였다.
앨범을 더 뒤로 넘기니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엄마는 위암 때문에 항암치료를 하고 있어서 살과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 그래서 여름인데도 가발과 얇은 옷을 겹쳐 입고 할머니와 마지막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그 당시 엄마 본인도 움직일 수 있는 때가 그때 뿐이라는 걸 알고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앨범을 다 보고 나니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꾸역꾸역 참아냈다. 엄마의 장례식을 다 치르고 나서 큰 외삼촌, 작은 외삼촌과 함께 여기 작은 방에 둘러 앉아 앨범을 보고 있었다. 삼촌들이 엄마 어렸을 적 얘기부터 내가 태어나고 자라서 엄마와 함께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듣고 있다가 울음이 튀어나왔다. 그런 엄마를 이제는 못 본다고 생각하니 꺽꺽하면서 울어댔다.
“이 녀석아······니만 슬픈 거 아니다. 어? 니만 힘든 게 아니야.”
나는 화가 났다. 아니 그럼 슬픈 것도, 눈물이 나는 것도 남들 눈치를 보면서 하란 말인가. 눈물을 닦으며 큰 외삼촌에게 한 마디 하려고 하자 작은 외삼촌이 중간에서 우리를 타일렀다. 그러고는 큰 외삼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잠깐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났다. 이번에는 슬퍼서가 아니라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서 난 눈물이었다.
그 이후로는 엄마 사진을 잘 꺼내 보지 않았다. 엄마가 있는 추모공원도 두 번만 가고 가지 않았다. 왜냐면 또 슬프고 눈물이 날테니까. 나만 슬프고 힘든 게 아니니까. 몇 년을 그렇게 살았더니 할머니와 삼촌들이 모여서 내 얘기를 할때는 꼭 이 얘기를 했다.
“아니, 너는 어쩜 그렇게 무심하냐. 엄마 안 보고 싶어? 엄마 보러 왜 안 가! 니 엄마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니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까먹었지? 하도 안 가서.”
“우리가 안 가더라도 너는 가봐야지······.”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어른들은 내 생각 내 감정이 중요치 않다. 그저 본인들이 보기에 안 좋으면 뭐라고 하기만 할 뿐. 가족이라는 말은 나에게 늘 겉도는 말이었다. 나는 그들의 모임에 억지로 끼어 있었다. 돌아가신 엄마의 핏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나를 신경 쓰는 건 그저 본인들 마음 편하려고 그런 것이다. 내 생각, 내 감정은 알려고도 하지 않을뿐더러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니 오직 할머니 입을 통해서만 나를 보고 판단한다. 내가 말하는 건 아직 철 덜 들었다면서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일을 하면서부터 명절 날 몇 번 본가에 못 갔을 때였다.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삼촌들만 할머니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너는 그러지 못해서 그런거냐면서 서운해 하지 말라는 둥 온갖 얘기로 나를 못난 놈으로 만들어 갔다. 내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항상 오던 명절모임에 안 올 리가 없다고 했다. 친척도 거의 없어서 우리끼리 더욱 똘똘 뭉쳐야 한다, 얼마 안 되는 가족인데 몇 번 이러면 더 얼굴 보기 힘들다고. 가족? 누가 가족인데. 그 모임에 진짜 나는 없다. 그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모습의 ‘나’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