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병원과 초등학교에서도 어느 덧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처럼 내 표정도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환자들을 대할 때나 아이들을 대할 때나 늘 똑같은 무표정으로 마주했다. 이를 보다 못했는지 식당에서 같이 일했던 영영실장은 얼굴표정이 중요한 자리에서 왜 그러냐고 따끔하게 얘기를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작업반장님이 무슨 일 있냐고 계속 물어보면서 표정을 조금만 밝게 해달라고 했다. 두 분다 틀린 얘기가 아니다. 직장은 사회생활이니까. 그러니 나는 사회 생활을 잘 못하는 편이다.
아침에 초등학교에 출근을 하니 2학기 부터는 일하는 구역을 교체한다면서 이모님과 나를 6학년이 있는 곳으로 배치했다. 초등학교에서 제일 무서울 것 없는 학년이 6학년이라더니. 점심시간에 올라가니 미친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들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보였다. 여자애들은 복도에서 거리낌 없이 거칠게 춤을 추고 있었고 남자애들은 욕을 하면서 서로 때렸고 그게 아니면 괴성을 질러대며 돌아다녔다. 표정이 자꾸만 일그러지는 것을 꾸역꾸역 참고 배식을 하느라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냥 그만둘까.
저녁에 출근을 하니 정문 옆에 있는 영면실에 사람들이 몇 명 모여 있었다. 우는 소리도 들리고 원망 하는 소리도 들렸다. 날씨가 변하는 시기에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신다고 했던 말들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최근 들어 이틀에 한 번 꼴로 돌아가시니 말이다. 의자에 앉아 점검일지를 쓰고 있으니 보호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이제 속상할 일 없으니 마음 편하게 가세요. 엄마...! 근데...나는...우리는......어떡해?”
“엄니. 거기 가서는 아버지랑 화해 하시고 웃으면서 가요. 그 동안 우리 키우고 돌보시느라 고생 많았어요...엄니...엄니......”
“할무닝...사랑해요!”
마지막에 어린 아이의 ‘사랑해요’가 마음에 탁 걸렸다. 사랑한다는 말. 엄마에게 평생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살아오다가 마지막 돌아가시는 날에야 했다. 그것도 할머니가 시켜서였다. 할머니는 나에게 귀가 제일 마지막으로 끝이나니까 귀에다 대도 사랑한다고 큰 소리로 말하라고 시켰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머뭇거리다 겨우 작은 소리로 사랑한다고 목 밖으로 내뱉었다.
할머니. 내 기억 속 할머니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일곱 살 적에 이혼 했다. 오갈데가 없었던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와 둘이서 어렵게 지내는 모습을 가까이서 매일 보니 짜증을 많이 내셨다.
“이 녀석아! 고기 그거 뭐 몸에 좋다고 맨날 고기 타령이냐? 하여튼 안 좋은 건 지 애비 닮아 가지고.”
“아니 무슨 애가 손만 갖다대면 다 고장내거나 부수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꼬옥 지 애비 같은 행동만 하네.”
할머니에게 얹혀 살기에 별 말 없었던 엄마도 계속 들으니 참지 못하고 폭발한 적도 꽤 있었다. 왜 그렇게 뭐라하냐고.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면서. 그러면서 참아왔던 속 얘기를 다 내뱉었다. 할머니와 엄마의 불 같은 대화가 계속 이어져 나가다가 할머니가 더 이상 할 얘기는 없는데 너무 화가 나니까 기어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여기 내 집이니까 나가!”
“······.”
엄마는 알겠다고 말하고는 나를 데리고 작은 방에 문을 잠그고 들어갔다. 할머니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내가 울면 엄마가 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 같아서. 울음은 어떻게든 참았는데 생리현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 나 쉬.”
눈물을 닦던 엄마는 조용히 화장실에 갖다오라며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주었다. 나는 뒷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화장실까지 걸어갔다. 참았던 게 나와서 그런지 꽤 길게 나왔다. 그렇게 볼 일을 보는 동안 무슨 소리가 들렸다. 변기 물을 내리고 화장실을 나가니 큰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였다.
엄마와 나는 다행히 집을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아프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