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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Jun 20. 2024

삶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지리멸렬.

 나는 이 단어가 싫다, 아니 싫어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지리멸렬이란 사자성어를 처음 접하고 그 뜻을 찾아봤을 때부터 이 사자성어만큼 인생을 잘 표현한 말은 없으리라는 불안한 직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 인생은 실제로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지리멸렬. 이리저리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

 동네 의사에게 딸을 데리고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보라는 연락이 왔다. 딸이 과호흡 증세를 보여 찾아갔던 병원 의사다. 흰 의사 가운 안에 늘어진 검은 원피스를 걸친 의사는 그간 내가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고, 무엇보다 사려 깊어 보이는 눈빛은 이 사람이 정말 내 딸을 걱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우리 아이에게, 아니 남의 인생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너무 희귀해 아이가 신경안정제 링거를 맞는 동안 진료 대기실에 걸린 의사의 약력을 살펴봤다. 응급실에서 오랜 기간 일을 했던 의사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환자를 지켜본 의사여서 그럴까. 여하튼 그 의사는 우리 아이가 가진 문제는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아이도 그 의사가 싫지 않았던지, 한사코 거부하던 정신과 진료를 덕분에 다시 시작했다.

 가벼운 공황장애, 범죄와는 연루되지 않은 청소년 일탈행동. 의사의 진단은 이미 엄마인 나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청소년의 경우, 치료가 잘 지속되지도 않고 호전됐다가도 악화 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이의 몸 밖으로 튕겨 사방으로 흩어지는 광경에 이미 익숙한 터라 의사의 말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생각의 작동을, 자신도 뚜렷하게 파악하기 힘든 내면의 움직임을 타인이 파악하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아무튼 의사는 공황장애 약을 처방하며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아이에게 필요한 게 뭔지 정확히 찾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아이보다 엄마의 우울증이 깊어 보이는데,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지 않다. 시간이 어서 흐르기를 바라며 주어진 만큼의 숙제만 겨우 해결하는 삶.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짙은 안개를 헤집고 어디로든 걸음을 떼긴 하나 어디로 가는지 도통 감 잡을 수 없는 인생. 요즘 같아선 한시라도 빨리 잠이나 자고 싶다.

 퇴직 후 아들 밥도 차려주고 옷도 빨아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선배를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사람과 사람의 거리는 태평양처럼 아득히 멀어 타인에게 공감을 구하는 건 무용하다는 생각에 속 얘기를 하지 않은 지 오래다. 선배도 뱉는 말보다 삼키는 말이 많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한 공간에서 일을 할 때 그 선배 역시 가족 간 문제로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는 걸 봐설까. 겨우 20분 남짓 지하철에 같이 서 있는 동안 선배는 내 말에 눈시울을 붉히며 내 손을 잡아 주었고, 나는 그 선배가 지금도 쓸쓸하다는 느낌이 들어 입이 썼다.

 누구도 삶이 쉽다고 말한 적 없다. 그럼에도 노력하면, 열심히 살면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은 삶의 크나큰 동력이 된다. 하지만 그런 믿음조차 동이 난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는지 궁금하다. 끝도 안 보이는 가시밭길을 밟으면서도 꾸역꾸역 앞으로 가야 하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허리를 삐끗해 찾아간 보건실에서 웬 여학생이 보건교사와 상담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자해를 하고 찾아온 여학생이라고 했다. 그런 학생이 많다고 했다. 생명 존중, 자살 예방, 금연, 약물 중독...해마다 늘어나는 예방 교육, 지원방안이 쏟아지는 데 내 아이를 포함하여 왜 그리 많은 아이들이 공황장애, 우울증, 자살 충동을 겪으며 무너질까.

 그런 생각도 든다. 몸살을 앓는 지구가 언제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지 모르는 마당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그 모든 말이 다 쓸데없다는. 삶이란 애초에 브레이크 없이 될 대로 굴러가는 자동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고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 사는 게 순리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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