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희 Jul 06. 2024

볼펜이라도 들어 길을 만들어야 하는 시간.

 자는 아이를 깨워 병원에 데려갔다.

 계속되는 딸의 비행과 방황에 남편도 나도 정신상태가 매일 널뛰기를 한다. 사소한 잔소리, 곱지 않은 시선에 울고 불며 머리를 쥐어뜯는 아이다. 처방받은 약은 먹으라고 해야 먹으면서 진통제를 달고 사는 아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하루라도 빨리 눈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난하다. 산다는 건.

 금요일 저녁. 퇴근해서 아이 방을 들여다보니 학교 가서 1교시도 채 못 채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요즘 같아선 밥하기도 귀찮고 청소하기도 귀찮고 만사 귀찮다. 아이가 없었으면 책이나 펼치고 자다 깨다 하며 방전된 에너지나 추스를 적막한 금요일 밤이 되었을 터. 전 날 밤 아이의 뻔뻔하고 무례한 행동에 기가 차 한 소리 했더니 손에 잡히는 불펜으로 방바닥과 팔을 긁어대며 오열하던 모습이 떠올라 관둘까 하다 토요일 오전 병원 진료도 안 보러 간다 할까 싶어 아이를 살살 달래 치킨 한 마리 앞에 가족이 모여 앉았다.

 내가 감당 못할 아이의 말과 행동, 아이가 저지른 비행들을 언젠가부터 남편에게 조금씩 떠넘겼더니, 남편도 한계에 이르렀는지 평소엔 잘 참아 넘기던 사람이 취기에 아이 심기를 건드렸다. 아이가 학교 앞 경비실에서 근무하는 어르신께 아무 존칭 없이 ‘경비’라고 불러서다. 효심이 지극한 시골출신 남편은 어르신에 대한 ‘공손치’ 못한 아이 태도가 못마땅해 아이를 쏘아보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 잔소리를 했다.

 순간 뭔 일인가 싶었다. 갑자기 아이가 왜 자기한테만 난리냐며 소리를 지르고 울고 불며 뛰쳐나갔다. 주섬주섬 치우고 주위를 정돈했다. 하루 이틀일도 아닌데, 이런 일이 벌어질 때 마다 마음이 아득해진다. 부모가 죄인이냐며, 이제 애가 새벽에 들어오든 아예 안 들어오든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남편의 말을 들으며, 정말 신경 끊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깜냥도 안 되는 주제에 결혼은 왜 했으며, 아이는 왜 낳았을까. 겁도 없이. 하나마나한 생각들이 푹푹 한 숨이 되어 나오는 데 아이가 들어와 자기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 묻을 쾅 닫았다.

 옅은 담배냄새에 속이 역했다.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하니 밖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 집에서도 그러면 어떻게 사냐고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이와의 대화는 늘 도돌이표다. 답도 뭣도 없이 제자리만 맴도는. 대화 끝에는 항상 아이가 묻는다. 대체 자기를 왜 낳았냐고. 자기는 존재 가치도 없고,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은 다 힘들어지기만 한다고. 친한 친구들도, 엄마 아빠도 다 자기랑 있으면 힘만 든다고. 사실도 진실도 아니라고 숱하게 말해도 소용없다. 귀를 틀어막은 아이에게 무슨 말이 들릴까.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다 대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물으니 그냥 행복해지고 싶단다.

 얼마 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었다. 젊어서 느끼지 못한 많은 감정, 생각들이 밀려와 고전의 가치를 새삼 재확인 하면서도, 톨스토이 역시 ‘이 힘든 인생을 살기’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같은 명작에서 인간관계와 삶의 본질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묘사한 톨스토이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톨스토이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작가인 위인의 책에서도 삶에 대한 유일한 진실은 삶은 끊임없이 지난할 것이라는 것. 그게 삶의 속성이라는 것 외에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명작이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을 터다.

 딸을 보면, 가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떠오른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은 바틀비처럼 아이가 외로울까 걱정되고, 내가 죽은 후 홀로, 오로지 홀로 삶을 견디다 부러질까 가슴이 에인다. 밉다가도, 때론 연을 끊어버리고 싶을 만큼 혐오감이 일다가도 종국엔 자라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아이의 방황에 연민이 느껴진다. 톨스토이 같은 작가도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찾게 만든 그 고단한 삶을 딸애가 바틀비처럼 살지 않기를, 삶이 아무리 허망하고 덧없어도 ‘삶의 이유’를 찾아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침 일곱 시. 낮밤이 바뀌어 일어나지 못하는 딸을 깨웠다. 다행히 아이가 별 말 없이 일어나 병원 갈 준비를 했다. 병원에 가는 내내 아무 말 않다 딸에게 전했다. 의사 선생님은 너를 도와주는 분이니까 네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라고.

 대기실에서 진료실에 들어간 딸을 기다리는 데, 아침부터 아픈 사람이 많다. 딸아이 덕에 재작년인가 처음 방문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대기실 풍경에 깜짝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그저 동네, 내 직장, 학원이나 마트에서 볼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말없이 진료를 기다리던 모습 때문이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둘 곳 없는 마음을 갖고 있구나 싶어 가슴 한 구석이 쓰렸다. 이심전심이라 망가진 내 마음도 그들의 마음과 같이 진동하는 것 같았다.

 진료 대기실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노인 한 분이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섰다. 처음 방문하는지 생년월일을 묻는 질문에 41년생이라 짧게 답하는 어르신 얼굴엔 너무 많은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얼핏 보면 단조로워 보이는 평범한 얼굴에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대기실에서 각자 앉아 있는 모두의 얼굴이 다 그랬다. 한 편, 80살이 넘어도 사는 게 힘든 일이로구나 싶어 가슴이 답답했다.

 진료를 보고 나온 아이가 의사 선생님이 엄마를 찾는다고 해 진료실에 들어갔다. 딸아이가 입원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는 처방이 나왔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진료와 입원이 가능한 병원 찾기가 쉽지 않지만 자신도 찾아볼 터이니 내게도 수소문해보라 했다. 의사 선생님은 부모와 아이가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게 서로에게 나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힘든 삶이나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보일 때다. 인간이 고통스러울 때 알약 한 알로 쉽게 삶을 종료시킬 수 있다면 자살률이 몇 배는 증가할 터다. 수시로 죽겠다는 아이가 그런 알약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면 비행을 저지르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을 부러 골라 내뱉던 이렇게 내 곁에서 아직 살아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비단, 아이 때문에만 삶을 좀 손쉽게 놓을 수 있는 알약이 있으면 나도 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수많은 밤이 있던 건 아니다. 그놈의 희망.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안 보일 때,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생각한다.

 아무튼 약을 바꿔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진료실을 나와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누구하나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사람이 없다. 휴대폰을 보거나 멍하니 진료실에 있는 화분이며 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다들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다. 착하고 순한 얼굴들이다. 불현 듯,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안보이면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삶의 길을 내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레빈의 말처럼 ‘정신상태가 바뀐다고’ 삶의 방식이 금세 바뀌지는 않겠지만, ‘무한한 시간 속에, 무한한 물질 속에, 무한한 공간 속에 유기체인 거품 방울이 떨어져 나오고 어느 정도 모양을 지탱하다가 터져버리는 그 방울이 바로 나’일 테지만, 그럼에도 당장엔 살아나가야 하므로 볼펜이라도 들어 길을 내야만 한다고.

작가의 이전글 삶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