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작가가 직접 들려준 삶의 의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왜 존재하며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 세이노의 가르침와 같은 인생설계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것이 그러한 이유다.
어제 강연회에 당첨되어 유시민작가를 만났다. 어렸을 적부터 글쓰기 특강, 어떻게 살 것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거꾸로 읽는 세계사 등 유시민작가의 다양한 책을 접하며 글쓰기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강연을 듣고 나니 상상하던 그 이상으로 더 멋진 분이셨다.
한 시간 반의 강연과 질문이 끝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사인을 받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쉽기도 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인생>이라는 단어였다. 작가님이 말하는 인생의 정의는 '지속적인 고통과 간헐적 행복'이다. 인생은 늘 고통이고 우리는 그 짧은 간헐적 행복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데, 그 행복이 왔을 때 느끼는 행복감이 고통보다 더 크기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
도파미네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몸은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나오는데, 사람에게 쾌락을 주는 호르몬이다. 하지만 쾌락의 과잉은 오히려 고통을 유발한다. 뇌에서 보상을 얻기 위한 동기부여로 우리에게 도파민이 나오고, 이것을 삶에 적용하면 보상이 곧 간헐적 행복이다. 지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면 오히려 중독이 되어 고통이 길어진다. 행복은 늘 '간헐적'이어야만 한다.
글을 쓰면서 인생은 볼품없는 나날들의 연속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실제로 삶의 지속적인 고통은 대부분이 살아가며 뼈저리게 공감하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공부만 하고 살아온 그는 진리를 찾고 논리를 검증하는 과정보다 이제 그 간헐적 행복에 좀 더 집중하실 거라고 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해 소중한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그 과정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큰 감동과 행복을 느끼며, 시간이 없기에 하기 싫은 것(가령 기자와의 정치 인터뷰 등) 은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개인이 삶을 바라본 '지속적 고통과 간헐적 행복'에서 나아가 사회로 접근해 보자.
앞서 쓴 글에서 우리가 멋진 자동차, 좋은 집, 좋은 옷을 갈망했던 게 불과 100년도 안 됐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람도 똑같다. 불과 80년 전에 우리보다 발전한 유럽의 선진국에서는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에서는 150년 전만 해도 사람을 재산의 일부로 여겼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멀쩡하던 문명국가가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락으로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원래 이렇게 사람은 욕망을 추구하는 동물인가? 그들이 문명을 만들고 사회를 만든 건 욕망 때문일까? 오로지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 나를 지키기 위한 생존본능의 노예들일까?
이솝우화를 보면 한 아이가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면 그 누구라도 나서서 도와주려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보상을 얻으려는 것이 아닌 아이를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 선의의 행동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바로 변이다. 변이는 생물학적인 정의로 같은 종에서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모양과 성질이 다른 개체가 존재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누구는 이타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낄 것이고, 누구는 나에게 보상이 없다면 이타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구는 아예 별 관심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이다.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하한선도 상한선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한쪽으로 빠지면 끝없이 치우쳐 그 균형을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이타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끼도록, 선하고 올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도록 서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가 있는 것이고, 누구나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냥 맹목적인 교육보다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개인과 사회가 노력하는 것. 나와 너, 우리가 좀 더 높은 수준으로 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개인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이라고 믿는다.
그 누구도 어떤 개체도 '나는 왜 태어났지? 왜 존재하지?' 존재의 이유와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냥 우연히' 하드웨어인 뇌와 몸만 가진 채 그렇게 태어났다. 뇌는 생존기계에 불과하지만 자기를 이해하도록 만들어진다. '나는 왜 존재하지?'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선시 되어야 그것이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발전이 있다.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인간은 퇴행해 버린다.
이 강연을 듣고 진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삶의 의미에는 정답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 '없다'. 없는 것이 정답이다. 이 의미는 내가 살아가면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 의미를 만들면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크게 간섭하거나 동요되지 않으며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지금 살아있는 모두에게 다 통하는 보편적 공감이다. 바로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 내가 믿고자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이 옳다고 믿으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 삶의 의미라고 여긴다. 좋아하는 것에 간헐적 행복이 크게 오고, 그 큰 행복으로 또 지속적인 고통을 감내할 힘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 한 권이라도 더 읽고,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이 아까운 시간을 간헐적이게나마 행복하게 보내는데 집중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