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웨일>, 신이 아닌 인간에게 구원받는 이야기
영화 <더 웨일>. 단 한 번이라도 사람에게 상처받았거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모두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다. 자기 앞에 놓인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난 일의 반성과 화해로 삶을 구원받고자 하는 한 사람의 전쟁 같은 여정을 그렸다. 고통받는 세상 모든 이의 삶을 바꿀 영화다.
몸무게 278kg, 정상 혈압을 한참 벗어난 주인공 찰리는 온라인 글쓰기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카메라를 꺼 학생 그 누구도 그의 얼굴을 모른다. 딸이 8살이 되던 해, 결혼한 아내와 딸을 버리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사랑했던 남자 앨런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에게 남겨진 건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거구의 몸무게와, 사고를 치고 집에서 쫓겨난 방문전도자, 앨런의 여동생, 그리고 구원을 가장한 죽기 전 돈이라도 챙기려는 가족들의 억지 관계뿐이다.
엘리는 아직 미숙한 학생이다. 8살 때 버림받은 아픔과 외로움이 남긴 상처는 그녀를 한없이 삐뚤어지게 했다. 그의 볼품없는 행색을 SNS에 올리고 저주하며, 화해의 건네는 찰리를 이용해먹으려 하는 마음뿐이다.
찰리의 전처이자 엘리의 엄마는 돈이라도 있는지 확인해야 하기에 딸을 이용해 에세이 숙제를 맡긴다. 이후 집까지 찾아와 그가 떠나고 힘들었던 인생, 행복했던 여행의 추억, 영혼까지 털어낸 추억의 조각들로 포장해 그에게 죄책감을 선물한다. 이젠 진짜 그에게 남겨진 건 아무것도 없다.
관객은 오로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반성, 용서, 화해, 사랑 이 모든 복합적인 감정이 발휘하는 기적을 고대한다. 러닝타임이 고작 방 한 칸, 다섯 명도 안 되는 등장인물 관계에서 인간이 위기를 대하는 행동과 생각이 꾸밈 없이 노출되고,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감정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는 영화에서 말한 그대로 끔찍했던 본인의 과거 실수를 끊임없는 사과와 반성으로 구원받고자 한다. 그의 주변 여동생, 엘리, 방문전도자 모두 그에게 도움을 주고 구원하고자 하지만 모두 각자의 사정과 목적존재한다. 그들에게도 이 삶은 고통이며 전쟁처나 다름없다.
엘리가 묻는다.
"왜 진작에 내 인생에 있어주지 않았어? “
“엘리, 날 봐, 누가 날 자기 인생에 끼워주고 싶겠니?"
깊은 침잠과 감정의 파고가 몰려드는 대사다.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사회는 야속하기만 하다. 찰리는 폭식으로 본인에게 형벌을 내리고, 자신의 본모습을 학생들에게 솔직히 보여주며 마지막 수업을 끝낸다. 딸이 쓴 에세이를 읊으며 기적처럼 두 발로 일어나 빛을 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구원하고 영생시킬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원초적인 용서, 화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를 스스로 추동한다. 마치 바다로 나아가는 고래처럼 끝내 찰리가 빛을 마주하게 되는 이 영화의 열린 결말은 우리에게 폭넓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두 발로 웃으며 엘리에게 가는 찰리처럼 전쟁터 같은 이 관계 속, 결국은 마지막까지 구원하고자 했던 유일한 희망 엘리에게 걸어간다는 것은 실제 관계 간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구원이 가지는 서사가 더 폭넓게 완성된다는 느낌을 준다.
죽어간다는 찰리의 심각한 병세를 영화 내내 강조하면서도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는 죽지 않았다. 월요일에서 금요일이 아닌 토요일과 일요일은 어떤 구원을 받고 영생을 거쳐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는 끝내 러닝타임 내 죽지 않았다.
이를 통한 감독의 의도는 가해자의 죽음만이 결국은 용서라는 편협하고 원론적인 결말에 반기를 드는 듯하다. 결국 가해자의 죽음은 온전히 살아있는 피해자에게 전가된다. 범죄도 마찬가지다. 복수를 한다 해서, 가해자가 사형을 선고받는다 해서 피해자는 본인의 아픔과 분노사 한 번에 물 흘러가듯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가해자의 죽음과 같은 결론은 조금 더 안온적 삶을 살고자 하는 피해자가 가진 이기적인 <필요악>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흉악하고, 끔찍한 범죄의 가해자에게도 그들을 구원하는 용서와 갱생이 합리화되어야 하는가. 과연 그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인가. 깊은 고뇌에 잠긴다.
'알아야겠어,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단 걸!'
찰리가 그의 전처에게 하는 대사를 보자. 유일한 한 사람, 딸 엘리에게는 늘 무조건적인 희생과 사랑을 보인다. 그녀의 현실을 부정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아이라고 하는 부모의 심정은 무슨 심정일까. 핏줄에 의한 무조건적 사랑이 그의 과거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단 한 사람에게라도 사랑받고 관심받는다면 그 한 사람의 믿음이 그에겐 구원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래도 한 가지, 그의 인생을 대변할 순 없으나 끝내 그는 솔직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솔직함과 진솔함이 그가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서 증명되었고, 엘리의 에세이가 본연의 목소리와 경험, 개성이 있다고 극찬하는 점은 그가 꾸밈없이 과거를 반성하고 화해를 건네는 모습과 일치했다.
글로 내 생각을 담는다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드러내는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마지막까지 본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글쓰기‘로 엘리의 글을 첨삭하며 죽기 전 삶의 의미를 느끼고 싶어 한 것 같다.
하, 어차피 죽으면 다 끝나는 삶. 사람관계는 서로에게 희망일 수 있고, 누군가에겐 절망의 끝일 수 있다.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구원의 손길.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이기적이고 이중적 잣대 속, 용서와 갱생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 여부와 다양한 의견의 여지를 남겨준다.
아픔이 있는 자들은 이 영화를 꼭 보자.
힘들고, 어렵고, 좌절하고, 슬퍼도 우리도 언젠가 두 발로 서서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꼭 느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