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를 아시나요?
모두를 위로하는 곳, 아이슬란드
30년 넘은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언제일까?
단연코 18년도 새해를 함께 했던 아이슬란드다. 이 이상의 이벤트는 내 인생에서 당분간 없을 것이다.
뉴욕 인턴생활을 마치고 아이슬란드행을 결심했다. 지도를 켜보니 뉴욕에서는 3~4시간 정도였다.
난 아이슬란드에 갑자기 왜 가고 싶어 졌을까?
21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등병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군대로 다시 복귀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관심병사가 되어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다분히 강제적이고 연민 어린 관심들은 내 생에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난 하루 24시간을 감시당했다.
수많은 감시 속에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책이나 읽어야지. 불침번 근무를 서던 고요한 새벽 4시. 나는 우연히 책 하나를 읽게 된다. 제목은 '나만 위로할 것'. 그저 누구나 상관없었다. 그저 위로받고 싶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21살의 나에겐 지나치게 과분했다.
책의 배경은 아이슬란드였다. 난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공허함과 쓸쓸함이 글에서 그대로 전해졌다. 작가는 아이슬란드에 전례적인 화산 폭발이 일어나 비행기가 결항해 아이슬란드에 갇혀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가 하나 둘 빠져 건강도 악화된 매우 힘든 생활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느끼는 작가의 희망 섞인 세상을 바라보는 눈, 아이슬란드가 주는 위로가 나는 참 부러웠다.
언젠가 혹시 기회가 되어 아이슬란드에 가게 된다면 내가 가진 아픔, 힘겨웠던 시간들을 펑펑 내리는 아이슬란드의 눈과 함께 다 씻겨내리리. 아이슬란드는 21살의 내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찬 장소였다.
전역했다. 이런 날도 오긴 오는구나. 그때 시규어로스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시규어로스는 아이슬란드 출신 록밴드다. 시규어로스의 목소리는 마치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 아이슬란드가 다시 생각났다. 꼭 가보고 싶었다.
뉴욕 단칸방에서 네이버 블로그에 들어갔다. 광주에서 온 국어 선생님 형, 프랑스, 영국 각자의 위치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들, 그리고 뉴욕에서 출발하는 나까지 4명이 모였다.
난 그렇게 아이슬란드에서 그들의 앨범을 샀다.
레이캬비크는 아이슬란드의 수도다. 무지개를 보는 듯한 지붕의 아담한 집들은 영하 20도도 따뜻하게 만들었다.
레이캬비크의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많았으며 과묵했다. 행동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났으며 수수하며 과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넷의 아이슬란드 9박 11일 대여정이 시작되었다. 아이슬란드는 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링로드를 통해 여행을 한다. 둥근 아이슬란드에 고속도로가 하나밖에 없어 마치 반지를 연상케 해 링로드라 부른다.
차라고는 우리뿐인 눈 오는 도로에서 드라이브를 할 때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20분을 쉼 없이 달려야 하나씩 볼 수 있는 SUBWAY와 편의점은 반갑다 못해 신기했다. 손님도, 주인도 모두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또 올게요'라는 말 대신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로 대신했다.
링로드의 출발점 southeast icelandGeysir라는 곳이 있다. 골든 서클 중 가장 유명한 여행지다. 게이시르는 아이슬란드어로 '솟아져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땅에서 온천이 뿜어져 나온다.
20분을 기다리니, 꿈에서 볼 것만 같던 물이 위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내 속에 있었던 지난 걱정, 근심 모두 뱉어내는 기분이었다. 겉잡을 수 없는 물기둥에 나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겉은 평범하지만 속은 한없이 화려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슬란드를 얘기할 때, 아마 모두가 가장 먼저 '오로라'를 떠올릴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여행이 딱 이틀 남긴 시점에서 나는 오로라를 포기했다. 일기예보에 남은 이틀이 모두 악천우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알람이 왔기 때문이다.
비와 눈이 함께 내리는 따뜻한 아이슬란드 호텔에서 잠을 자고 있던 찰나 새벽 두 시, 형이 나를 깨웠다. 형은 카메라를 들고 잠옷 차림으로 나가자고 밖으로 뛰어갔다. 아이슬란드의 겨울 새벽 2시는 말도 못 할 만큼 추웠다.
우리는 그렇게 오로라를 보았다. 실제 눈으로 보았을 때는 평생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였음을 그때 느꼈다. 이걸 본 뒤로 내 가슴속에 새긴 좌우명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자.
오로라 앞의 나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유일하게 기다리는 건 금요일 밤과 해가 오래 뜨는 여름이다.
금요일 밤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다. 여기저기서 삐쩍 마른 젊은이들이 클럽 앞에 줄을 선다. 마치 365일 춥고 고독한 날씨에 반항이라도 하는 듯하다.
겨울의 추위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금요일 밤만 되면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 생동감 있게 살아난다. 아이슬란드와 우리의 찾기 힘든 공통점이다.
우리도 금요일 밤을 즐겨보자고 아이슬란드 맥주를 사러 밖을 나갔다.
아니 그런데 잠시만. 앳되 보이는 아이들이 오픈카를 몰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아이슬란드에는 the runtur라는 문화가 있다. 나이가 어려 술집에 못 들어가는 아이들이 운전을 하며 고성방가를 지르며 노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의외로 관용적인 모습에 놀랐다.
아이슬란드에는 총 37만 명이 산다(21년). 제주도의 절반이다. 인구가 그중 20만이 레이캬비크에 집중되어있다.
이 작은 도시는 내가 거쳐갔던 곳들과 물리적 거리가 주는 좌표 말고도 참 많은 게 달랐다.
지구의 가장 북쪽에서, 지구의 시작을 알리는 곳. 좌표가 주는 의미와 같이 나에게도 어쩌면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27살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었다. 나의 27살의 겨울은 그렇게 시작됐다.
여태껏 살아온 내 삶에는 항상 결과물을 필요로 했다. 단 며칠간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고 늘 나는 무언가 얻어가야만 하는 강박에 시달렸다. 최소 가족을 포함한 내 지인들에게 면목이라도 있으려면.
여기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그냥 드라이브하고 아주 천천히 걸어 다녔다. 늘 필요 이상의 빠름과 과한 욕망에서의 나를 내려놓고 공허함이 몰려와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과 쓸쓸함이 싫지 않았다. 뉴욕 맨해튼에서 우러러봤던 높은 연봉, 좋은 직장, 넓은 집, 달콤한 보상들이 참 부질없고 의미 없었다.
아이슬란드에서의 기억은 나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소박함, 미니멀한 삶을 넘어 비우는 것의 아름다움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아주 하찮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삶.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그저 뭘 하든 괜찮은 곳.
실수해도, 해고를 당해도, 잠시 쉬어가도, 혼자 있어도, 이루지 못해도, 무엇을 얻어가지 않아도, 돈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다 괜찮다. 다시 일어서면 된다.
그렇게 아이슬란드는 우리 모두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