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척에 속고 있는 우리의 민낯에 대하여
스위스 친구집에 며칠간 묵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멕시코에서 나와 함께 스페인어를 같이 배우다 친해진 친군데, 마치 스위스의 자연경관처럼 늘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도 잘생겼는데, 겉치레에 단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추우면 외투를 입고, 더우면 반팔을 입는 그런식이었다.
썰매를 타러 산에 올랐는데 경관이 예술이었다. 한국인들에겐 융프라우가 유명하지만 실제로 융프라우는 살인적인 물가에 관광객에게만 인기 있는 곳이고 융프라우보다 더 멋진 곳이 스위스에는 많다.
그때 썰매를 타며 경관을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눈으로 담아, 사진보다 눈으로 담는 게 더 느끼는 게 많을 거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 말이, 지금은 너무 크게 와닿는다. 20대에는 사진만 찍으며 살았다. 핸드폰을 바꾸면서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외장하드만 해도 몇만 장은 될 거다. 사진은 추억팔이용으로 그 값을 충분히 하지만, 그것을 SNS에 올리고, 일상을 공유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유독 해외에 나가면 사진을 찍는 데 한국인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다. 왜냐면 100장 찍어서 잘 나온 1장을 건져야 하거든. 인스타에 올려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아닌 그 찰나의 연예인 같은 사진 하나를 위해 시간을 허비한다. 친구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는 늙는다. 오늘이 내 전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그럼 이 유한한 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근데 우리 한국인은 철저히 ’행복해 보이기 위한‘ 삶을 산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비단 사진뿐만 아니다. 앞서 말한 욜로정신도 그렇다. 객관적으로 보면 한번 즐기다 가는 인생, 아주 바람직한 이론일지 모르지만 여기서도 냄비근성은 발효된다. 남들이 행복해 보이는 것에 다 따라 하기 바쁘고, 설령거짓일지라도 ’좋아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가짜들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야 하는 건 맞으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또 전부는 아니다.
목표도 없고 꿈도 없는 그냥 자유로운 성격인데 대학 졸업 후 남들이 공무원 시험준비를 한다고 해서 나도 따라가서 노량진에서 준비를 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가. 우리는 보이는 게 아닌 진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외국인들은 인생을 주체적으로 남눈치 안보며 잘만 사는데, 근데 왜 우리는 진짜 행복의 정의를 모르는 걸까. 왜 유독 한국인만 이런 걸까?
먼저 관료제문화 속 뼛속깊이 자리 잡은 수직적 조직문화를 들 수 있다. 대한민국은 수직적 조직문화 아래 한강의 기적, 경제성장이라는 달콤한 결과를 맛봤다.
까라면 까 마인드로 안 되는 것도 (억지로) 가능하게 해 기업과 국가의 성장을 일궈냈다. 이 뒤에 철저히 뭉개진 개인의 희생을 뒤로 한채.
내 밥벌이를 지키는 것은 오로지 윗사람한테 잘 보이는 것이었고 조금이라도 이를 벗어나면 낙오자 취급을 받았다. 개인의 개성과 가치관은 철저히 묵살당한 채 커왔고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획일화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행복의 기준도 교과서나 미디어에 나온 ’돈 많고 권력 있는 자‘ 그게 곧 행복이고 높게 평가받는 삶의 가치였다. 그 정도로 우린 가난했었으니까.
다음, 타인과의 비교다. ’나는 왜 쟤보다 못하지‘와 같은 열위의 비교, ’나는 쟤보다 돈이 많아‘우위의 비교. 타인들과의 비교 속 이를 선동하는 언론, 무수한 주변 환경들. 이 모든 게 우리를 행복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인스타그램과 SNS는 온갖 ‘좋아요 수’에 평가받는 단편적이고 정량적린 비교 속에 우리네 삶을 송두리째 망쳐놓았다. SNS에 비친 현실과 괴리감 있는 남들의 하이라이트 순간들은 우리를 한없이 비참하게 한다. 모두 실제와 다른 실속 없는 과시와 향락들이다.
물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외국인들도 마찬가지로 상사나 가족,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는모두 있다.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표본 기준을 내가 아닌 타인에서 찾는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물질적 결핍은 늘 우리 행복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이 시장이 유통될 때 교환가치에 따라 그 상품의 가치가 결정된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도 이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 구석이 짙다. 상품이 얼마나 유용한지 ‘사용가치’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잘 팔리는지 ‘교환가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시장경제에 잠식되면서 우리도 우리가 잘하는 능력이나 개성, 실질적인 가치보다 얼마나 타인에게 인정받느냐, 얼마나 호감을 살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며 살게 되었다. 마치 자신을 교환가치 높은 인기상품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아래 결혼시장 표를 보자.
2022년 기준 결혼시장 성공 표준모델이다. 키, 재산, 직업 숫자로 정량화할 수 있는 비교가 끝도 없다. 이 정해진 표준모델에 부족하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걸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저 기준에 우리가 목숨 걸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않고 불행한 거다.
이 자료는 더하다. 심지어 올해 최신본으로, 직업에 따라 결혼시장 등급을 매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열 매기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전 세계에 이런 자료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거다. 타인과의 비교 속 우월감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편협한 사고다.
타인의 시선, 비교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보다 나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 여성들은 해외에서 한국에서 절대 낯부끄러워 입을 수 없는 옷들을 과감하게 입는다. 그들은 남한테 크게 신경 안 쓰거든. 해변가에 가면 비키니를 훔쳐보는 남자는 한국과 중국남자가 전부라고 한다. 남의 시선과 비교에 목숨 걸어봤자 나만 손핸게 그들은 나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관심이 없다.
마지막으로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다.실패도 해보고 도전하는 문화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한지 알 수 있는데 대한민국 사회는 한번 도전해서 실패하면 재기를 어렵게 만든다. 경제적 어려움과 날카로운 사회적 시선들이 우리를 궁지로 내몬다. 이러니 다들 정답이 정해져 있는 (그리고 나와 맞지 않는) 길을 택하고 행복과 멀어지는 삶을 사는 거다. 그리고 주말엔 남들이 좋다는 것을 따라 하고자 행복한 ‘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우리에겐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합리적인 기준이 부재하다. 이 원인은 사실 본인에 있다. 본인이 무엇을 해야행복한 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우리에겐 자기 탐색 시간이 현저히 부족하다.
우리는 타인에게 행복해 보이기 위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외국에 살아보면 이를 더 느낄 수 있다. 이제 진짜 나의 행복을 느끼러 가야 한다.
서두르자. 인생은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