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그리 Dec 28. 2023

중소기업 다녀도 글 써도 되나요?

조건과 취향 사이에서의 태도에 대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온전한 내 코어, 취향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의 색깔과 취향은 위기가 와도, 슬럼프가 와도, 그 어떤 이의 힐난도 이겨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사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지난 내 취향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오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릴 때 쉬는 시간마다 밖에 나가 축구를 하는 아이들 대신 나는 책을 좋아했으니 이렇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것이 재미있는 나만의 취향이 있었기에 멕시코에서 스페인어, 미국에서 영어를 배워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든 것이다. 누가 시키거나 권하지 않아도 어디론가 이끌려 나만의 무언가를 하고 있는 지금, 그게 본인만의 취향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가 된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철저히 지켜내야 하고 존중받아야만 하는 개인의 취향보다 조건에 더 목숨을 건다.

연봉이 얼만지, 나에게 어떤 보상을 주는지, 부모님 배경, 학력, 외모, 키, 자산•••

당장 주변에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해도 남자들이 가장 먼저 묻는 건,

“이쁘냐?”

이다. 못 믿겠다면 주변 미혼의 남자분들에게 여자소개를 해준다고 한번 말해보면 된다. 가령, 나는 책과 게임을 좋아하는데 그분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물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씁쓸한 현실이다.

 

 우리가 조건에 집착해도 의미가 없는 이유는 이는 가변성을 띄기 때문이다. 오늘 부자여도 내일 당장 망할 수 있고, 마르고 뛰어난 몸매도 관리를 안 하면 언젠가 뚱뚱해질 수 있고, 연봉이 삭감될 수도 있고, 해고를 당할 수도 있고 모아둔 돈을 다 잃을 수도 있다. 오늘 로또에 당첨되어도 내년에 다 사라질 수 있다는 거다.

진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코어는 바로 내 취향이다.

예를 들어 나는 등산을 좋아하는데,

“영화를 왜 좋아하냐? 영화 좋아하지 마”

라든가, 나는 피자보다 치킨을 좋아하는데

“치킨이 왜 좋아? 너 치킨 좋아하지 마. 이제 피자 좋아해”

라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건 바로 내가 살면서 절대 침범받아서는 안 될 코어영역, 온전한 나만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내 취향을 지켜야만이 내 미래를 지켜낼 수 있고 더 발전된 나만의 자산을 만들어갈 수 있다.


 어제 이런 일이 있었다. 글 쓰고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친한 형이 이런 질문을 했다.

“갑자기 궁금한 건데, 네가 만약 직업이 없거나,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글을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비로소 취향과 조건이 결부되는 질문이다. 중소기업에 다녀서 월 100만 원을 벌든, 200만 원을 벌든, 직업이 없어 백수로 지내든 고민 없이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 그게 바로 온전한 내 취향을 지키는 일이다. 취향은 본인이 조건 없이 좋아하는 일이다. 관심 있는 게 딱히 없어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상담을 해오는 이들이 있는데, 일상 속에 내가 그냥 좋아서 하는 모든 일들이 취향이 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조건과 연결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번다? 그걸 우리는 재능, 혹은 천직이라고 부른다. 눈 뜨고 코베이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 하나만 지킨다면 단순히 회사, 조직의 목표가 아니라 나만의 목표를 채워나갈 수 있다.

최근 이직을 통해 새 직장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가 주변에 있다. 그런데 기존 회사 사람들이 계속 어디로 가냐고 캐묻더니 뒷담화를 하는 걸 엿들었다고 한다.

“여기가 더 좋은데 왜 거길 가지? 이해를 못 하겠네”

“뭐 집에 돈이 많거나 배경이 있었겠지, 아는 사람이 있었겠지”

내 가치관, 내 색깔 하나 없이 타인의 조건과의 맹목적 비교에서 오는 급급한 자기 방어다. 본인만의 세계에 갇혀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하긴, 유튜브를 보면 지독하게 선하고 바람직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상에도 악플은 늘 존재한다. 남을 깎아내려야만이 본인이 더 월등해진다고 믿는 사람들. 왜곡된 자아에 고립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여전히 주변에 있는 이유는 그 어디에서도 침범받지 못하는 본인만의 단단한 취향이 없기에 그렇다. 그래서 불안한 거다. 무수한 조건들 사이에서 진정한 코어를 찾는 일이 곧 가치 있는 내년을 만드는 출발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연말인 만큼 오랜만에 지인들과의 만남도 갖고, 희망찬 내년을 그리며 따뜻한 나날들을 보낸다. 들뜬 분위기라 그런지 올 한 해 열심히 달려왔으면서도 긴장이 풀어져 조금씩 방전됨을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슬럼프라고도 하더라.

슬럼프는 원래 ‘진흙탕에 빠지다’라는 뜻의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다. 보통 슬럼프는 공부, 스포츠, 게임, 노래, 학습 모든 일상생활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다. 아무리 노력하고 훈련이나 연습을 반복해도 효과가 없는 경우를 말한다. 요컨대 노력을 해도 성적 부진이 나오거나 혹은 평소보다 실력이 더 안 좋게 느껴지는 경우다.

나는 이 슬럼프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슬럼프의 정의를 다르게 말하고 싶다. 바로 ‘관심사의 이동’이다. 그저 본인이 슬럼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슬럼프인 것이고 실제로 진흙탕에 빠진 것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내면적 코어 가치인 취향이 이동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들뜬 연말에 여행을 가고 싶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푹 쉬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다른 일에 집중했다가 또다시 이 취향은 내가 좋아하는 글이나 책, 새로운 것에 시도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지난 주말, 아울렛에 갔다. 영하를 웃도는 지금 이 날씨에도 우리는 봄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아울렛에서 시즌오프 반바지를 산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하면서 봄이 왜 안 오는지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년 여름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미리 여행계획을 세운다. 내년 여름이 올지 안 올지 확실치 않아서 예약을 거부하는 호텔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이처럼 취향도 똑같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은 그대로 다시 오게 되어있고, 우리는 무수히 변화하는 조건들 사이에서 취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답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어차피 우리가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평생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 나 자신뿐이다. 고로 나만의 취향은 이렇게 믿음을 주고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한다.

취향은 이처럼 성스러운 것이다.


여러분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작가의 이전글 형은 왜 산업은행을 퇴사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