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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Feb 02. 2024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기로 했다

눈치와 삶의 질의 상관관계

3월에 일본을 가는 게 벌써부터 설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일본 특유의 국민성에 큰 관심이 있어서다.

주변에 일본에서 십 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이 유독 내게 하는 얘기가 있다. 일본은 한국인들보다 더 불쌍한데도 더 행복하다고. 이 말은 뭐냐! 남들과 본인의 인생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거다.

작년에 결혼할 때 예물 관련 얘기를 하다 친구들끼리 기싸움을 한 적이 있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래도 결혼인데 샤넬은 해줘야지~”

적어도 미래 와이프가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혀있다. 참고로, 샤넬 클래식 미디움 가격은 1,500만 원을 호가한다. 그 누구도 강요한 적 없고 주입한 적 없고 시킨 적도 없는데 누구나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왜? 비교에서 지면 상대적 박탈감이 들거든.

이는 자동차나, 집, 옷, 명품,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 모든 것에 해당한다.


근데 일본은 다르다. 연예인이 명품을 하고 다니면

’아, 명품을 쓰는구나‘

근데 일반인이 명품을 하고 다녀도 똑같다.

‘아 명품을 쓰는구나’. 근데 대신 일반인은 여기서 더 추가되는 게 하나 있다.

‘아 명품을 쓰는구나, 근데 왜?’

더 불쌍하게 여긴다. 내가 생각하는 일본인은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가장 안타까워하는 듯하다. 이는 앞선 일본 경제 글에서 설명한 긴 시간 동안의 경기침체에서 자연스레 자리 잡은 생활습관이다.

단순 비교차원에서 일본 도요타나, 소니와 같은 대기업, 대한민국 삼성, 엘지, sk와 같은 대기업 연봉 수준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보다 일본 대기업은 연봉도 낮고, 국민들의 삶의 질 측면에서 크게 부유하지도 않다. 최근에는 경제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지만 잃어버린 30년, 40년은 이제 일본의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검소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본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

 

그냥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본인의 인생은 과소비, 검소 여부를 다 떠나 비교하지 않는 삶, 남의 삶과 시선에 큰 관심이 없다. 래퍼들이 흔히 하는 얘기처럼, i don‘t

give a f**k 이란 거다.

하지만 여기서 전제는 물론 상대적이다. 한국 여성들은 집에서 편의점을 갈 때 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화장을 안 하고 가지만, 일본 여성들은 바로 앞 편의점 갈 때도 화장을 하고 가는 여성이 많다. 수년간의 연구결과로 만들어진 MBTI도 모든 사람을 대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를 보며 나는 더 이상 남 눈치 보는 삶을 안 살아가기로 했다. 앞에 예시를 든 일본을 비롯한 유럽, 미국, 멕시코 내가 여행하고 살았던 모든 곳에서의 사람들은 그 아무도 눈치 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눈치를 안보되 적어도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는 확실한 선이 있다. 그뿐이다. 문화사대주의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이게 진짜 한국인에게 결여되어 있는 우리가 진짜 지녀야 할 태도다.

일전에 카우치서핑(공짜로 여행객들에게 본인의 거실 소파에서 하룻밤을 재워주는 어플리케이션)으로 알게 된 미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 와 여기저기 서울여행을 함께 다녔다. 그 친구가 가장 놀랬던 것은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 직장인들 중, 나이가 있는 사람들 앞으로 절대 걷지 않고 다 뒤에서 걷는다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자리에 앉아서도 인사도 너무 깍듯하게 하고, 임금님처럼 시중을 받드는 모습이 경악스럽다고 했다.

다 타인의 시선, 눈치를 가지니 나타나는 태도다. 특히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은 대체로 수직적이고 관료제 형식을 띠기 때문에 눈치 없이는 권력이나 명예를 찾기가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기로 했다. 자, 눈치를 보자. 한 명의 높은 직급의 대기업 임원이 있다. 물론 야망이 있어 높은 위치까지 승진하는 사람은 본인의 능력껏 그 자리까지 올라갔기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인재가 몰려있는 대기업에서 말이다.

근데 과연 앞으로 우리가 능력하나만으로 그 자리까지 가는 것이 가능할까? 당연히 아니다. 내 자리를 정해주는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한다. 근데 눈치를 보면 사람을 무서워하게 된다. 더 높은 직급의 사람 의중을 헤아려야 하고, 내 감정과 기준이 내가 우선이 아닌 그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기회를 본인에게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또 경쟁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 근데 사람들 감정 상하게 하고 꿋꿋이 주변을 밟으며 본인이 경쟁에 승리한 그 삶은 과연 행복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가족, 친구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친구한테 이 말을 해도 될까?’

‘엄마한테 이런 부탁을 하면 싫어하지 않을까?’

‘이 선택을 하는 데 부모님이 뭐라 하지 않을까?’

‘취업을 지금 안 하면 잔소리하시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고 행함에 있어 모든 일은 내가 스스로 책임만 지면 된다. 친구에게 따끔한 소리를 해야 할 땐 자신 있게 하고, 부모님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이기에 매사에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 있게 결정하면 된다.

눈치 보는 삶은 본질을 잃어버려 시간이 흘러 지금을 돌아볼 때 공허함이 생기고, 결국은 후회만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 생각은 99.9% 맞을 거라 확신한다.

설령 인생을 살면서 눈치만 보다가 내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돈을 많이 벌었다 치자. 진짜 가난한 것과 중산층의 차이는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과연 1억 가진 사람이랑 3억 가진 사람이랑 5억 가진 사람 세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들 삶의 질이 큰 차이가 있을까?

돈이 정말 많아도 다 못 쓰고 죽는 사람이 이 세상에 참 많다.

남 눈치 볼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거 하나 더 먹고, 진짜 내 시간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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