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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Feb 12. 2024

뭐든 당연한 요즘 사람들

100%인 것도, 당연한 것도 없다

명절에 부모님을 볼 때면 느끼는 것이 보지 못했을 때의 그리움보다 만나고 헤어짐의 아쉬움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고 늘 말하고 다녔던 나였는데, 부모님의 사랑만큼은 늘 당연하게 여긴 나는 아직 부족하기만 하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자기 주도적 사랑과 호의였음을 왜 그땐 몰랐을까. 울산역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게 가슴을 먹먹해지게 하는 장소일 것이다.

요즘 내게 부쩍 와닿는 것이 있다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100%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100%에 근접하게 각자 노력하도록 짜여 있을뿐이다. 예외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부모의 사랑도, 친구의 우정도, 주변인들의 호의, 연인 간의 사랑 모두.관계 속 각자의 기대는 온전히 각자만의 노력이 있었기에 유지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을 알 때에 작은 것에 더 감사하고 내 사람과 더 돈독해진다. 백날 말해봐야 본인이 직접 경험할 때만이 스파크처럼 머릿속에튀어 이를 간절히 느낄 수 있다.

정말 언제나 평생 내 옆에 있어 줄 것만 같았던 연인이 나를 떠날 때, 불의의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갑자기 불미스러운 일로 절연을 했을 때, 어쩌면 내 삶에 당연히 있어야 할 기본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인생에 당연한 건 없고 100%는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사람은 더 나은 것을 바라는 욕망이 있다. 누구나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기대하고, 하루하루 더 풍족하고 여유로워지길 바란다. 이는 보통 경제적인 문제나 자아실현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1을 가졌으면 2를 바라고, 2를 가졌으면 3,4,5•••이런 식이다. 모든 게 그렇다. 영어를 배워도 알파벳부터 배우고 문장을 배운다. 수학도 덧셈, 뺄셈을 할 줄 알아야 곱셉과 나누기를 배우듯.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공통점이 있다. 거꾸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거다. 3을 가지기 위해선 2가 전제되어 있어야 하고, 2를 가지기 위해서는 1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에겐 3보다 2가, 2보단 1이 더 중요한 기본적인 요소다. 우리 대다수는 1을 내 기본적 삶을 영위하게 하는 가족, 집, 돈 혹은 내 건강이라고 생각한다. 2가 내 본업인 직장, 친구, 연인 3이 부업이라고 했을 때 1과 2가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3은 실현하기 쉽지 않다는 거다. 2 본업이 없는데 3을 부업이라고 이름 짓기도 애매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가장 본질적인 것, 코어(Core)에 집중해야 한다. 다만 이 코어는 그냥,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내 주변을 둘러싸는 모든 이들의 노력과 호의 혹은 운이 좋은 상황일 때 주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늘 감사히 여겨야 한다.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에 일상은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그러면 뭐든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매 순간 주어진 것에 감사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순리대로 사는 것이다. 안 되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욕심과욕망 없이 사는 것. 모든 악의 근원과 일이 틀어지는 원인은 내 안에 있는 욕심에서 생긴다.

이루지 못한 것에서 오는 후회, 타인에 대한 기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남들과의 비교•••이 모두 내 안에 있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잠깐만 내려놓으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지금 내가 가진 코어에 집중할 수 있다. 어차피 될 일은 언젠가 이루어지고, 안 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된다. 나이키의 광고처럼 "'불가능은 없다, 무엇이든 되게 하라'는 문구는 20대 때 격하게 공감했다면 지금은 나를 옥죄는 말처럼 여겨진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려면 나를 둘러싸는 많은 사람을 짓밟고, 피해를 주면서 목적달성을 해야 하는 상황이 분명 생긴다. 그렇게 목적달성을 한들, 거기서 오는 공허함과 주변사람을 아프게 한 자책은 과연 목적달성의 기쁨을 상쇄시킬 수 있을까.


 30대가 들어서면서 유독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내 주변 모두가 각자만의 삶에 더 집중한다는 것이다. 20대에 그렇게 밤마다 술 마시며 웃고 재밌게 넘겼던 나날들은 이제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해도 그때만큼 재미가 없다. 간간히 오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우리는 종종 이런 얘기를 한다.

"우린 그때 뭐가 그렇게 웃겼을까?"

각자의 안정적인 직장과 자산에 안도한다. 재테크 정보를 공유하고 자녀가 있다면 자녀 자랑을 한다. 이 정도면 스스로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서로가 인정받으려 한다. 그때만의 즐거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집 가는 길, 가슴이 먹먹하다. 이 만남도 서서히 더 줄어갈 것이다. 이렇게 각자의 삶, 가족에 집중하면서 친구는 멀어지고, 우리는 타인과의 인터랙션이 줄어 본인만의 아집과 고집에 서서히 갇히게 된다. 각자의 고유한 자아가 형성되면서 매사에 당연하다는 본인만의 논리를 만들어낸다.

"제일 친한 친군데 축의금 얼마는 당연한 거야"

"친한 친구끼리는 돌반지도 해줘야 돼"

"명절에 부모님한테는 얼마 씩은 줘야 해"

"너는 남자니, 집안의 가장이니 제사에 빠지면 안 돼"

“적어도 30살까지는 취업을 해야 하고, 33살 전까지는 결혼을 해야 해"

"자녀를 가지지 않는 건 불효하는 거야”

이 당연하다는 논리의 생각의 원천은 자의식이다. 나만의 자의식이 점점 더 굳혀져 간다. 자의식이 크거나 작거나 상대적일 뿐, 자의식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나이가 들며 이것이 더 굳어지고 선명해질 뿐.

본인이 쌓인 경험만이 정답이라 생각하고, 자칭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그렇게 전염된 주변인들을 본인의 모습에 투영하며 흐뭇해하고 그들로부터 대접받고자 한다.

문제는 이 자의식이 잘못된 방향이라면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친다는 점이다.

본래 자의식이란, '나에 대해서 스스로가 인식하는 것' 그 자체를 말한다. 근데 스스로 인식하는 이 과정은 대개 안정과 도파민을 기반으로 생긴다. 가령, '나는 글쓰기를 할 시간이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이 자체가 안정과 합리화를 기반으로 한 자의식이라는 거다. 글쓰기를 할 시간은 사실 충분히 낼 수 있는데 본인이 없다고 뇌에 명령을 하는 거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이 잘못된 자의식에 (그건 핑계고, 시간은 만들면 되는 거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행자의 저자 자청은 이런 자의식 자체를 해체하고, 올바른 자의식을 애초에 가지라는 것인데 그걸 길러주는 힘이 독서와 글쓰기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잘못된 자의식 자체가 우리 삶을 괴롭힌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수용과 존중이 결여된 사회에서 당연함은 더 무분별하게 통용된다.

독서와 글쓰기도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 올바른 자의식은 욕심을 버리고 코어에 집중하며 이를 조금씩 줄여나가야 한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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