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그리 Apr 12. 2024

인생에 기회는 몇 번 올까?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사회 앞에서

최근에 꽤 중요한 선택을 할 일이 생겼다. 그 중요한 선택의 근간이 되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맨날 해오던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독서와 글쓰기다. 데이트를 하고 나서, 밥을 먹고 나서, 약속이 없는 주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 유독 나는 책을 봤다. 다른 친구들은 축구를 하러 나가고, 넷플릭스를 보고, 서핑을 하러 가고, 여행을 갈 때 나는 유독 책에 손이 갔다. 그땐 그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는지 몰랐다. 근데 시간이 지나 지나온 나의 행동이 말해주고 있었다. 엔박스를 열고 사진들을 보면 책에 있는 문구, 책을 들고 있는사진, 서점 사진이 참 많았다. 이걸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이처럼 인생의 중요한 기회는 꽤나 우리에게 가까운 것에서부터 생기는데 그게 내 관심사다. 이번 기회도 어쩌면 거기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늘 하는 말 중 '좋아하는 걸 해라'가 있다. 이 말의 맹점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지 못하면 사실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거다. 내가 진짜 미술을 너무 좋아하는데 결과물이 시간이 지나도 형편없다고 하자. 큰 성장 없이 그 어떤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데 이를 단지 내가 좋아만 한다는 이유로 과연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답은 행동에 있다. 좋아하는 걸 계속 나만의 방식대로 반복하면 나만의 요령이 생겨 어쩔 수 없이 능숙해지게 된다. 그러면 이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분명히 기회가 온다. 기회가 와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갈래가 나뉘어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것이지, 기회가 안 온다면 사실 선택도 못한다. 생계를 위해서 하고 싶은 걸 평생 하지 못하고 죽는 거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 않나. 그래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매 순간이 사실 선택하는 삶인데 더 나은 걸 하나씩 선택하면서 우리는 성장하는 거다. 근데 선택지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게 바로 도태되는 삶이다.

왜 우리는 도전을 이상적인 단어라 여기고, 기업의 인재상에 이 단어가 꼭 들어가 있는지 아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새로운 선택지가 생길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고, 그 새로운 선택지가 있으면 우리는 성취를 느끼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전에 실패했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숫자 0과 같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그만한 경험을 얻었기 때문에 마이너스는 절대 성립될 수 없다. 이처럼 개꿀인 게임이 어디 있나.


그런데 이 당연한 진리를 모르쇠 하고 사람들은 그 시간에 타인에게 눈을 돌려 그들을 깎아내린다. 그리고는 그들을 스스로 높인다. 마치 본인은 이미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해서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잡아 한 분야에 있어 성공한 사람처럼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독 관계주의에 젖어온 터라 타인에게 오지랖이 넓다. 무언가 행동하는 데 있어 뜯어말린다. 시작부터 전에 우려와 근심을 이만치 안고 간다. 특히 남의 일이면 더더욱.

"내가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너 같은 사람 수없이 만났는데~"

라고 시작하는 타인의 말을 수없이 많이 들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99.9% 결론은 부정적인 말이다. 이렇게 누군가 말문을 트는 이가 있다면 그냥 뒷말을 듣지 마라. 어차피 뻔하다. 듣는 이를 진심으로 생각하기에 결국은 하지 마라는 것이다. 근데 기회는 어떻게 온다고? 이 말 다 무시하고 그냥 해야 온다. 제발 남을 설득하려 하지 마라. 설득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당하게 거절하면 된다. 그럼 내 분야에 성공한다.

다양성과 포용이 가장 중요시되는 사회다. 대한민국 교육제도나 팍팍한 청년의 삶을 논하기 전에 우리에게갇힌 고정관념을 깨트려야 대한민국 청년의 삶이 더 존중받고 성장할 수 있다.

"나 때는 말이야~"

라는 말을 2030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란 건 모두가 알것이다. 꼰대 그 자체. 나 때는 이랬는데 너네는 지금 편한 거다, 복에 겨운 거다, 고생하나 안 하는 거다, 등등 꼰대를 넘어 요즘은 '젊은 꼰대', latte is horse('라떼'는 '말'이다 영어로 직역) 등으로 우스꽝스럽게 조롱하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는 '나 때'는 최소 15년, 많게는 30년 전 얘기다.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모두가 체감할 정도로 바뀌었다. 근데 그 와중에 우리 생각과 사고방식은 안 바뀌길 바라는 그들의 말은 시대를 역행하는 행동임을 반증한다.

나는 청년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좋아하는 걸 더 많이 하기 위한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들이극단적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의 마음가짐으로 매사를 대했으면 한다. 이게 무슨 소릴까?

"아, 그랬구나. 넌 미술을 좋아하는구나"

"요즘 애들은 이렇게 음악을 공부하는구나, 신기하네"

"너는 이렇게 글을 적는구나, 특이하고 재밌다"

다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방식이 정답일 수도, 정답이 아닐 수도 없다. 학창시절에 시험 100점은 존재해도 인생에서 100%란 없다. 이 생각이 오히려 더 시대의 변화흐름에 발맞추는 것이고, 청년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근데 나는 알고 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이런 태도가 나오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실시간으로 더 어려워진다. 이유는 만약 내가 이걸 받아들이고 내가 생각해 왔던 것을 내려놓는다면내가 이때까지 살아온 삶을 전부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타인에게도 그렇게 비치거든. 그게 두려운 것이다. 단순 정치색만 봐도 대한민국을 반으로 잘라 한쪽은 빨강, 다른 한쪽은 파랑이지 않나. 그것도 몇십 년동안. 40살이 그걸 인정하면 내가 살아온 40년이 부정당하는 거고, 50살이면 50년, 60년이면 60년이다.어떻게 그걸 인정하기 쉽겠나.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의 작은 틀, 우주에서 바라보면 먼지만도 못한 아주 미세한 그 울타리 안에서만 살다가 죽는 것이다. 55살에도 영어공부를 하는 아저씨가 내 주위엔 있고, 60살 정년퇴직 후지게차 자격증을 공부하시는 친한과장님이 계신다.

기회라는 정의는 개개인마다 다양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 계속 오는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뜻하지 않게 내가 계속 꾸준히 해오던 것에서 얻는 기회에서 느끼는 것이 많다. 사람들이 다 말려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진짜 그렇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나이만 먹는 것이다.


기회는 무수히 온다. 우리가 타인의 설득에 휩쓸려 그걸 기회라고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는 설득하지도 말고, 설득당하지 말자. 바뀌지 않겠다고 하는 이들은 그렇게 본인만 안 바뀌면 된다.

아니면 반대로 하고 말고를 타인의 말에 결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마음속에 답이 있는데 ‘그래, 너의 말이 다 맞아’라는 말이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던 경험이 있으니까. 응, 너 말이 다 맞으니 그대로 하면 된다. 우리가 선택한 그 길이 맞다.

이전 15화 뭐든 당연한 요즘 사람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