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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Feb 22. 2024

지하철 사람의 두 얼굴

인간의 양면성에 대하여

최근 이틀간 지하철 같은 장소에서 흔하지 않은 두 가지 경험을 했다. 어떻게 해서 내게 이런 경험이 일어났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인간의 선과 악, 양면성에 대한 고찰을 해보려 한다.

그저께는 갑자기 새벽 지하철에서 어떤 여성분이 ‘쿵’하고 자리에서 쓰러졌다. 심지어 자리에 앉아계신 여성분이셨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셨는데 주변에 있는 5명~6명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을 도왔다. 누군가는 지하철에 신고를 하고, 누군가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누군가는 서울교통공사 지하철 안내원을 찾아갔다. 다행히 중간에 지하철은 멈췄고, 안내원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그분은 병원에 잘 갈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인간의 ‘선’을 직접 목격했고, 그 감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자본주의에 냉철함과 자기 살기 바쁜 이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이 가진 ‘따뜻함’을 보았다.

‘아직 대한민국은 살만한 세상이구나’ 하며 누군가를 돕는 게 이토록 삶에 큰 의미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그런데 어제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두 명의 중년 남성분과 같이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는데, 그 남성 두 분 앞에 앉아 있는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로 그 자리에 앉겠다고 몸싸움을 하며 욕을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다른 승객분들이 말려 다행히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았지만 그 몸싸움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 피해를 보고, 우리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아닌 중년의 남성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인류애를 잃었다. 나는 그때 인간의 ‘악’을 봤다.


이틀 사이에 인간의 선함과 추악함을 둘 다 경험하며 느끼는 것이 있다. 나는 다른 두 사람을 예시를 들며 선과 악을 나눴지만, 사실 한 사람 안에서도 선과 악은 공존한다. 우리 각자는 긍정적인 속성과 부정적인 속성 모두를 가진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있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타인의 평가도 제각각인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처럼 인간의 양면성은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늘 모순만이 가득하다.

일상 속의 양면성의 예시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힘들게 입사해서 돈도 많이 벌고 여유 있게 살아가더라도 시스템 안에 짜여진 일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재미없는 일 말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

인생의 힘든 시기가 왔을 때 누군가는 그 혼돈 속에서 본인을 다독이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려 한다. 그 노력 속에서도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라며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순간도 분명 상존한다.

이와 반대로, 무언가 성취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사람들은 본인이 잘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신감으로 더 높은 성취를 일군다.

반면,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보며 ‘왜 난 저렇게 못하지, 원인이 뭐지’ 라며 비교 속에서 좌절한다.


혼돈과 질서, 지기 기만과 좌절, 선함과 추함 결국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양면성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바둑의 흑과 백과 같다. 어떤 날은 백과 같이 순박하고 착한 선의 모습을 보이고, 또 어떤 날은 이기적인 악의 모습을 보인다. 결국 우리는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바둑의 백과 같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백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기 위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선택이 옳다고 스스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그것이 믿고 살아간다면 진짜 말 그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 어려운 일을 겪거나 회복 불가능한 무언가가 내 앞에 있을 때 어느 정도의 자기기만은 이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처럼 나를 믿고내가 하는 모든 선택이 옳다고 믿으면 설령 그것이 잘못된 길이다 한들 나 스스로가 틀린 걸 정답으로 만들 수 있다. 남을 내 것, 내가 가진 가치에 둘 필요가 없다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타인이 보는 나의 모습의 이면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양면성의 결과에 대해 살펴봤다면 그럼 이 양면성은 도대체 결국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욕망이다. 우리나라가 50년 사이 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에 따른 경쟁심과 열등감이 불러온 욕망 때문이다. 근데 그걸 이룬 현대사회는 이 욕망 때문에 인간의 양면성이 극랄하게 드러나 우리 인생의 발목을 잡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순들, 인간의 양면성,

지하철의 이 두 사건을 이틀 사이 겪으며 이젠 이 이중성을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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